봄부터 학생들의 아우성과 몸부림이 신문지상 여기저기서 읽혔다. 그러던 중 6월 4일 자 대부분 신문에 실린 한 사건이 서울신문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왕따 폭력으로 말미암은 대구 고교생의 자살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다음 날 10면에 추가분석과 함께 실렸다. 속보성에서는 뒤졌지만, 심층보도로 보완한 사례다.
같은 면 ‘저소득층 학생일수록 신체적 폭력에 더 노출’이란 기사는 저소득층 학생이 신체적 폭력의 피해를 당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반면에 욕설이나 따돌림 등 정서적 학대는 일반 아동의 비율이 더 높았다. ‘학교폭력 알려질라 외부전문가 참여 기피, 그들만의 폭력대책위’란 기사는 학교폭력 발생 때 대책위원회가 학교 내부인사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해결보다는 외부에 알려지지 않게 하는 데 급급하다는 내용을 싣고 있다. 적절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5월 29일 자 11면에 실렸던 ‘또 설문조사요? 초등생들 뿔났다’라는 기사는 현재 진행 중인 학교폭력 대책이 효율적이지 않음을 시사한다. 2월 학교폭력 실태조사 이후 지금까지 아주 긴 설문조사를 4~5회나 한 학교도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뭔가 획기적인 대책이 나와야 하는데, 계속 실효성 없는 설문조사만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6개월 사이 대구에서만 무려 8명의 학생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보도된 사건의 수만 볼 때 그렇다. 보도되지 않은 채 멍든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학생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들은 대개 유서를 작성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의 내용은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들이 많았을 터인데 그것을 들어주는 이 없으니, 그리고 말해 보았자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평소 이야기하지 않다가 한꺼번에 마음속 가장 절실했던 말을 쏟아놓고 최후의 선택을 한 것이다.
더 희망이 없다고 느낄 때 선택하는 자살, 이에 대한 책임은 희망을 주지 못한 사회 구조에 있기도 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통제할 힘을 키우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 가정과 학교의 교육방식에 있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지나친 결핍 환경도 문제가 되지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채워주는 물질주의적, 과시적 가정교육도 문제가 된다. 이런 교육은 ‘자기통제력’을 길러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2일 자 ‘애플루엔자(과소비 중독증)에 병드는 아이들’이란 제목의 커버스토리에 등장하는 명품병 부모 아이들은 과연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다. 명품을 휘감은 청소년도 폭력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된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통제할 힘을 길러 주는 것이다. 겉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데 치중할 것이 아니라 내부의 힘을 키워야 한다. ‘내 아이’만큼은 힘들지 않게 하려 애쓰는 부모의 마음이 의도와 달리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키우지 못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아이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시대 학생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이유는 마음속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목표가 아닌, 외부 압력으로 형성된 목표에 집착함으로써 생기는 스트레스 때문이다. 그 집착은 우리 교육제도의 인위성과 부모의 획일적인 성공기준 때문에 생긴다. ‘남들에게 그럴듯해 보이는’ 것들을 강조하다 보니 정작 ‘내 아이’가 정말 원하는 것, 정말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자살, 폭력, 게임중독, 사교육 등이 범람하는 이 시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학생들에게 미래를 위해 현재를 참아내라고 강요하는 것은 더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청소년들이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발산시킬 수 있는 소통과 활동의 출구가 필요하다.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 속의 교육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 볼 때다. 학생들이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세상,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세상을 우리 어른들은 진정 만들 수 없는 것일까.
나은영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또한, 5월 29일 자 11면에 실렸던 ‘또 설문조사요? 초등생들 뿔났다’라는 기사는 현재 진행 중인 학교폭력 대책이 효율적이지 않음을 시사한다. 2월 학교폭력 실태조사 이후 지금까지 아주 긴 설문조사를 4~5회나 한 학교도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뭔가 획기적인 대책이 나와야 하는데, 계속 실효성 없는 설문조사만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6개월 사이 대구에서만 무려 8명의 학생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보도된 사건의 수만 볼 때 그렇다. 보도되지 않은 채 멍든 가슴을 안고 살아가는 이 시대의 학생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들은 대개 유서를 작성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의 내용은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린다.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들이 많았을 터인데 그것을 들어주는 이 없으니, 그리고 말해 보았자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평소 이야기하지 않다가 한꺼번에 마음속 가장 절실했던 말을 쏟아놓고 최후의 선택을 한 것이다.
더 희망이 없다고 느낄 때 선택하는 자살, 이에 대한 책임은 희망을 주지 못한 사회 구조에 있기도 하고,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통제할 힘을 키우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 가정과 학교의 교육방식에 있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지나친 결핍 환경도 문제가 되지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채워주는 물질주의적, 과시적 가정교육도 문제가 된다. 이런 교육은 ‘자기통제력’을 길러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2일 자 ‘애플루엔자(과소비 중독증)에 병드는 아이들’이란 제목의 커버스토리에 등장하는 명품병 부모 아이들은 과연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가? 그렇지 않다. 명품을 휘감은 청소년도 폭력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된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통제할 힘을 길러 주는 것이다. 겉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데 치중할 것이 아니라 내부의 힘을 키워야 한다. ‘내 아이’만큼은 힘들지 않게 하려 애쓰는 부모의 마음이 의도와 달리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키우지 못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아이 스스로 어려움을 극복해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 시대 학생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이유는 마음속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목표가 아닌, 외부 압력으로 형성된 목표에 집착함으로써 생기는 스트레스 때문이다. 그 집착은 우리 교육제도의 인위성과 부모의 획일적인 성공기준 때문에 생긴다. ‘남들에게 그럴듯해 보이는’ 것들을 강조하다 보니 정작 ‘내 아이’가 정말 원하는 것, 정말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자살, 폭력, 게임중독, 사교육 등이 범람하는 이 시대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학생들에게 미래를 위해 현재를 참아내라고 강요하는 것은 더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청소년들이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발산시킬 수 있는 소통과 활동의 출구가 필요하다.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 속의 교육이 어떤 모습일지 생각해 볼 때다. 학생들이 ‘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세상,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세상을 우리 어른들은 진정 만들 수 없는 것일까.
2012-06-13 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