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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 역사의 정치학, 교과서의 정치학/민병원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열린세상] 역사의 정치학, 교과서의 정치학/민병원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입력 2013-09-23 00:00
업데이트 2013-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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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원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민병원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역사교과서 검정을 둘러싸고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의 공방전이 치열하다. 보수의 시각을 반영한 교학사 교과서에 대한 반발이 거세게 일면서 역사교육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대전으로 비화할 기세다. 식민지시대와 한국전쟁, 남북 분단과 민주화 등 다양한 시각과 해석이 공존하는 격변기를 명쾌하게 가르친다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아 보인다.

그동안 역사교과서가 ‘좌편향’돼 왔기 때문에 바로잡아야 한다는 보수진영에선 대한민국의 정체성 확립과 국민국가 건설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강조한다. 식민지 경험과 전쟁, 그리고 산업화를 거치면서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싸움을 치러야 했던 세대들에게 이런 가치야말로 교과서가 담아야 할 핵심 아이템일 게다. 반면 진보진영에선 근대화 과정에서 드러난 왜곡과 부작용을 바로잡고, 한국사회의 생존·번영이라는 일방적 논리를 넘어 균형과 조화의 가치를 추구하는 비판적·미래지향적 과제를 더 중시한다.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갈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건 아니다. 소모적이고 무한반복적인 이데올로기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회적 장치를 만들자는 것이다. 보수·진보 진영 모두 상대의 주장과 의도를 파악하고 있다면, 자신의 논리로 상대를 설득하려는 무모한 노력보다는 상대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제3의 ‘대안’을 모색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대립적 가치가 서로 보완될 수 있는 방식으로 통합 반영된 역사교과서를 집필하고, 역사 해석의 다양성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대립적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깨닫도록 해주는 역사교육의 ‘장’(場)이 필요하다.

박근혜 정부의 한국사 교육 강화 정책이 제도화되고 교과서 파동까지 재발하면서 역사교육 개편의 진정성을 둘러싸고 진보진영의 비판과 의심을 불러일으켜왔다. 이와 관련해 박 대통령은 지난주 ‘정확한 사실’과 ‘균형 잡힌 역사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념 논쟁이 교과서에 반영돼선 안 된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그런데 ‘사실’과 ‘균형’에 대한 강조가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서 ‘레토릭’으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구체적이고 실현가능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보수·진보 진영의 ‘입장’을 재확인하고 ‘원칙’을 반복하는 차원을 넘어 상대를 끌어들일 수 있는 현실적 제안이 이뤄져야 한다.

이런 노력은 친일파의 행적이나 박정희 정부의 성격에 대한 해석을 뛰어넘어 근·현대사의 핵심 테제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무거운 과제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서로 다른 세계관을 합치라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하지만 ‘좌편향’ 및 ‘우편향’ 역사교과서가 서로 ‘사실’과 ‘균형’을 대변한다고 우기는 혼란스러운 모습보다 훨씬 낫다. 후대를 위해서라도 이런 힘든 작업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 보수진영의 주장대로 한국사회는 고난의 시대를 넘어 지금에 도달했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치들을 확보해왔다. 진보진영의 주장대로 이제 한국사회는 근대화의 미션을 넘어 새로운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그동안 국가·민족·통일·번영의 가치가 역사교육의 전면에 등장해 왔다면, 미래의 교과서엔 어떤 가치들이 우선시돼야 할까? 단순한 절충론이나 양시론(兩是論)에 그칠 일이 아니다. 보수와 진보가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논쟁을 벌일 일이다.

한국의 역사교육은 대내적 이데올로기 대립 문제뿐만 아니라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와 같은 대외적 도전에도 직면해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같은 새로운 역사 프로젝트 역시 동아시아 민족주의 역사관 사이의 처절한 충돌을 예견하고 있다. 어찌 보면 국내 차원의 보수 대 진보의 대립보다 밖에서 이뤄지는 역사전쟁이 더 시급한 과제일 것이다.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국내 이데올로기 대립을 가능한 한 빨리 수습해야 할 이유다.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고 활용할 것인가는 언제나 이데올로기와 정치의 문제였다. 서로 다른 시각과 세계관이 충돌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사실관계에 대한 집착보다는 조정과 타협을 통해 합의에 도달해야만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역사교과서는 이런 차이와 다양성을 하나의 그릇에 담아내는 지혜로운 정치의 산물이어야 한다.

2013-09-2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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