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습희생자 추모 다음날 가해자 참배로 日보수우익 달래기 의도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미국 진주만 방문이 끝나자마자 일본 정부 각료들이 보란 듯이 2차대전 당시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신사를 잇달아 참배하고 있다.진주만에서 서방을 향해 떠들썩한 ‘반전(反戰)’ 퍼포먼스를 하던 일본 정부가 뒤에서는 전범을 참배하며 일본 내 우익세력을 다독이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야스쿠니신사 등에 따르면 이마무라 마사히로(今村雅弘) 부흥상과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방위상은 각각 28일, 29일 잇따라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 구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이마무라 부흥상이 참배한 시각은 아베 총리가 미국 하와이 진주만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진주만 공습 희생자를 추모한 직후다. 아베 총리와 함께 진주만을 방문한 이나다 방위상은 전날 밤 귀국한 뒤 이날 아침 일찍 야스쿠니신사를 찾았다.
야스쿠니신사는 근대 일본의 전사자 246만6천여 명을 신으로 떠받들고 있는 곳으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전 총리를 비롯해 태평양전쟁 A급 전범 14명이 합사돼 있다.
이나다 방위상은 특히 방명록에 ‘방위대신(방위상) 이나다 도모미’라고 적으며 정부 각료 차원에서 참배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모양새로 보면 전날 진주만에서 침략국 일본의 공습으로 인한 희생자를 위령하며 ‘화해’를 강조했다가 바로 다음 날 그 전쟁을 촉발한 가해자인 전범을 찾아 참배한 것이다.
그는 참배를 마치고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전쟁의 가해자들을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귀중한 분들”이라고 표현했다.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A급 전범에 대한 이나다 방위상의 인식이 잘 드러난다. 그는 또 “일본의 평화가 그 토대 위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잊은 적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처럼 아베 총리의 진주만 방문이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일본 정부 각료들의 야스쿠니 참배가 잇따르자 진주만 방문이 진정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일종의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아베 총리는 26~27일 일본군의 공습지인 진주만을 찾아 전쟁사죄와 반성을 담지 않은 채 “전쟁의 참화를 두 번 다시 되풀이해선 안 된다”는 메시지만 반복했다.
그동안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에서 진주만 방문에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이 나왔고 일본 내에서도 사죄와 반성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지만 ‘화해’나 ‘협력’ 등의 표현만 사용하며 추모를 했다는 이미지만 남긴 것이다.
일본이 미국과의 ‘화해’에 공을 들이고 있지만,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 한국·중국과의 관계에서는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아베 총리는 작년 9월 안보 관련 법제를 개정해 전쟁 가능한 국가로 한 걸음 더 내디뎠고 숙원인 평화헌법 개헌 추진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 각료들의 신사 참배는 자국내 보수 우익들을 달래기 위한 조치라는 의미도 있다.
아베 총리의 진주만 방문이 서방 국가들을 향한 퍼포먼스라고 해도 자민당을 지지하는 보수 우익층에는 진주만 공격을 사과하는 행위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익 성향의 산케이신문은 29일 자 사설에서 진주만 방문을 “(미국과 일본이) 평화를 지키는 동맹을 확인했다”고 평가하며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해서 진주만 방문을 보고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우익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의도는 진주만 방문 당시 아베 총리의 발언에 반성과 사죄 메시지가 배제됐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아베 총리가 진주만에서 발표한 메시지에는 (미·일 간의) ‘동맹’과 ‘화해’, ‘관용’ 등의 표현만 있었다.
아베 총리는 “전후 70년 평화국가의 행보에 조용한 긍지를 느낀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사과하는 듯한 뉘앙스의 표현은 절대로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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