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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이 일본을 버리기 시작했다”…‘낡은 사회’ 열패감에 가속화하는 ‘해외 탈출’

“일본인들이 일본을 버리기 시작했다”…‘낡은 사회’ 열패감에 가속화하는 ‘해외 탈출’

김태균 기자
입력 2023-05-19 10:31
업데이트 2023-05-20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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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르몽드 ‘낡은 인습에 조국 떠나려는 일본인들’
한국·프랑스보다 낮은 소득…미국의 절반수준
“호주에서는 週4일 근무하고도 월급이 2배”
아사히 “해외 영주 55.7만명…역대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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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사카의 대표적 관광지인 신세카이 혼도리 상점가. 김태균 기자
일본 오사카의 대표적 관광지인 신세카이 혼도리 상점가.
김태균 기자
“물가는 나날이 치솟는데 급여는 오르지 않는다. 업무에 찌든 하루하루. 그런 일본의 일상이 지겨워 해외에서 활로를 찾으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삶의 터전을 해외로 옮기려는 일본인이 늘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서구 유수 언론에서도 이를 비중 있게 다룬 기사가 나왔다.

일본 온라인 매체 쿠리에재팬은 지난달 프랑스 유력 일간지 르몽드에 실린 ‘낡은 인습에 지쳐 조국을 떠나려는 일본인들’이라는 제목의 도쿄 특파원 발 기사를 번역해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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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코로나19 하루 신규 확진자 수가 13일 이틀 연속 역대 최다(1661명, 1695명)를 기록한 가운데 수도 도쿄의 한 거리에서 기모노를 입은 여성들이 마스크를 쓴 채 걸어가고 있다. 2020.11.13  로이터 연합뉴스
일본의 코로나19 하루 신규 확진자 수가 13일 이틀 연속 역대 최다(1661명, 1695명)를 기록한 가운데 수도 도쿄의 한 거리에서 기모노를 입은 여성들이 마스크를 쓴 채 걸어가고 있다. 2020.11.13
로이터 연합뉴스
“올해가 일본 청년층의 ‘해외 탈출’ 본격화하는 원년” 주장도
19일 이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의 해외구직 정보업체 GJJ해외취업데스크는 외국에서 직장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구직 문의가 전년 대비 1.5배로 뛰었다. 젊은 층뿐 아니라 장년층 이상의 문의도 늘었다. 회사 관계자는 “이전에는 40세 미만의 명문대 졸업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현재는 50~60대 지원자들도 있다”고 전했다.

르몽드는 지난해 초 친구의 소개로 일본을 떠나 호주에 정착한 미즈노 유키(26)의 사례를 소개했다. 미즈노는 시드니의 한 레스토랑에서 일주일에 4일을 근무하며 월 40만엔(약 385만원)가량을 벌고 있다.

“일본에서 지금과 똑같은 일을 했다면 월수입이 19만엔 정도밖에 안 됐을 거예요. 생활도 이곳이 더 편리합니다.”

르몽드는 “미즈노는 높은 수입과 더 나은 업무의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을 위해 25세의 나이에 인생을 건 도박을 했다”며 “일에 치여 휴가도 못 쓰고 상사보다 먼저 퇴근하기도 어려운 일본의 구시대적 인습에 얽매이지 않고 다른 곳에서 미래를 찾은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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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일본 도쿄 증시의 움직임을 알리는 전광 시세판 앞으로 마스크를 쓴 한 행인이 지나가고 있다.  AFP 연합뉴스
31일 일본 도쿄 증시의 움직임을 알리는 전광 시세판 앞으로 마스크를 쓴 한 행인이 지나가고 있다.
AFP 연합뉴스
르몽드 “일본인들이 해외로 나가는 첫 번째 이유는 경제적인 부분”
후지타 히데미(28)도 시드니로 이주해 간호조무사로 일하고 있다. 수입은 일본에서 받던 것의 2배인 80만엔으로 뛰었다. 그는 “일본인 특유의 예절 바름과 성실함을 인정받고 있다”고 했다.

사사이 쓰카사 후쿠이현립대 교수는 “임금이나 노동환경, 사회의 다양성, 관용 등 측면에서 일본보다 북미, 유럽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점차 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르몽드는 “일본인들이 해외로 나가는 첫 번째 이유는 경제적인 부분”이라고 했다.

“일본에서는 1980년대 말 거품(버블)경제 붕괴 이후 비정규직이 급증했고, 1990년대 이후 임금 수준이 정체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달러 및 유로 대비 엔화의 가치가 급격히 떨어졌다. 세계 3위 경제대국인데도 갈수록 위상이 떨어지고 있다는 열패감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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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 긴자 번화가. 김태균 기자
일본 도쿄 긴자 번화가.
김태균 기자
일본의 달러 환산소득은 한국, 이탈리아, 프랑스보다 낮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 기준으로 2021년 일본의 평균 급여는 3만 9711달러(약 5300만원)로 38개 회원국 중 24위에 불과하다. 미국(7만 4738달러·약 9970만원)의 거의 절반 수준이다.

올해 ‘춘투’(봄철 임금협상)에서 일본 대기업들은 3%에 가까운 임금 인상을 약속했다. 이는 지난 20년 동안 볼 수 없었던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가 상승률을 따라잡을 정도는 아니다. 실제로 닛세이기초연구소는 올해 인플레이션율을 고려할 때 실질임금이 상승은커녕 0.2% 하락할 것으로 전망한다.

올해 대기업 임금 3% 올라도 실질임금은 -0.2%
르몽드는 “소득 문제와 함께 더 나은 워라밸을 가능하게 하는 노동 조건에 대한 갈증도 일본인들이 해외 이주를 원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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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 쓰고 출근하는 일본 시민들
마스크 쓰고 출근하는 일본 시민들 일본 도쿄역 밖에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출근하고 있다.
도쿄 AP·교도통신 연합뉴스
“일본 기업의 경우 평일 퇴근 후 저녁이나 주말, 그리고 유급휴가 등이 반드시 보장되지 않는다. ‘주 40시간’이라는 근로시간 상한이 있지만, 많은 경우 초과근무를 해야 한다. 유급휴가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도 실제 휴가로 절반 이상을 쓰는 경우는 드물다. 1년간 육아휴직을 받는 것도 쉽지 않다. 여성에게 임신은 경력의 종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르몽드는 “너무 불평등한 사회로부터 탈출을 위해 해외로 이주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캐나다 토론토대의 사카모토 이즈미 연구원은 “성평등 조사에서 116위인 일본에서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떠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남성보다 학업성적이 더 뛰어나더라도 여성이 얻을 수 있는 기회의 가능성은 여전히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성차별적이고 가부장적인 사회에 환멸을 느껴 20여년 전 일본을 떠났다는 사카모토 연구원은 “일손부족 때문에라도 여성 근로가 장려되고 있지만, 일본 정치인들은 여전히 여성은 집에서 아이와 노인을 돌보기를 원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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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의 도시바 본사 로고 아래에 한 남성이 지나는 모습. 사진=AFP 연합뉴스
일본 도쿄의 도시바 본사 로고 아래에 한 남성이 지나는 모습.
사진=AFP 연합뉴스
일본의 교육에 실망해 ‘반토막 급여’ 받고 해외로 떠난 대기업 직원
가뜩이나 인구 감소가 심각한 상황에서 인력의 해외 이탈이 가속화하고 있는 데 대한 우려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지난 1월 일본 외무성 통계를 인용, “2022년 10월 1일 현재 해외 영주권자는 역대 최고치인 55만 7000명에 이른다”며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유학, 해외 파견근무 등 장기 체류자가 감소한 반면 더 나은 생활과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떠난 사람을 중심으로 영주권자가 전년 대비 약 2만명 증가했다”고 전했다. 이는 10년 전과 비교해 14만명 이상 늘어난 것이다

아사히는 이 보도를 계기로 ‘다시는 일본에 돌아가지 않겠다며 딸과 함께 해외 이주를 선택한 여성 간호사’, ‘일본의 교육에 실망해 반토막 급여를 감수하고 해외로 떠난 대기업 남성’ 등 다양한 사연을 여러 차례 특집으로 다뤘다.

경제산업성 고위 간부 출신의 시사 평론가 고가 시게아키도 지난 1월 ‘슈칸(週刊) 아사히’에 쓴 ‘일본 대탈출! 엑소더스 원년’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올해가 일본 청년층의 ‘해외 탈출’이 본격화하는 원년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고가 시게아키 페이스북
고가 시게아키
페이스북
고가 평론가는 “낮은 임금, 직장내 갑질과 성희롱의 횡행, 비정규직 및 여성에 대한 차별, 연금 체계의 붕괴 우려, 애초부터 일본 경제에 내일은 없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 그런데도 일본에 남아 고령자를 부양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것인가”라며 “(이런 상황에서는) ‘일본 탈출’의 위험보다 ‘일본 잔류’의 위험이 훨씬 더 클 것이 분명하다”고 개탄했다.
김태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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