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 아라동 역사문화탐방로의 한 코스로 알려진 소산오름 편백나무숲길쉼터에는 맨발걷기(어싱)하는 탐방객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이맘 때면 어김없이 한라산 가는 길에 내려 앉은 양지공원에는 이별한 사람들로 붐빈다. 검은 정장을 하고 검정 넥타이를 매고 술 한 병, 사과 하나 든 검정 비닐봉지와 고인이 좋아하던 다방커피 한 잔을 든 남자도 거기 무리들 속에 끼어 있는다. 때론 아픔도 희미해진다. 시간이 모든 것을 달래준다. 마치 기억의 저장 창고에, 똑같은 규격으로, 똑같은 무게로, 짜맞춰진 상자 속에 편지 한 장 정도의 무게로 아주 가볍게 봉해지는 듯한 느낌이다. 아마도 시간의 묘약 때문이리라.
소산오름에서 만난 탐방객이 맨발걷기하던 발을 자랑스럽게 내밀며 깔깔 웃는다. 구암굴사 터줏대감처럼 지키고 있는 고양이, 소산오름 편백나무숲, 동굴에 들어선 구암굴사 대웅전(시계방향). 제주 강동삼 기자
# 오르는 오름 아닌, 내려가는 오름 소산오름… 편백나무 숲길에서 ‘어싱’하면서 치유하는 사람들
<15>어싱하며 치유하는 숲 소산오름·삼의악오름
그 숲길에서 요즘 유행하는 어싱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나이는 지긋한데 ‘맨발의 청춘’들이다. 요즘 전국적으로 ‘맨발걷기(어싱)’가 트렌드다. 제주 시내와 가깝고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오름이다. 어싱하는 머리 희끗희끗한 맨발의 청춘들이 걷기에 열중하고 있다. 편백나무숲 쉼터는 햇빛이 거의 들지 않을 정도다. 하늘로 높이 쭉쭉 뻗어 나간 편백나무들 밑에는 폭신한 흙이 반긴다. 양탄자를 밟는 푸석푸석한 느낌이 신발을 신고도 전해져 온다. 숲길 중간중간에는 평상들이 있어 한여름에 진작 찾아왔다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미친다. 해송, 삼나무, 대나무가 어우러져 시원하고 청량하다. 치유의 숲이라고 적혀 있을 정도니 명절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해주기에 충분해 보인다. 흙의 촉감을 느끼며 맨발로 걸으면 어느새 자연과 하나된다. 맨발걷기는 체내 전자파를 배출하고 혈액순환 촉진과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오름의 표고는 412.8m, 둘레 659m, 면적 3만 782㎡다. 소산오름은 소산봉(小山峰, 宵産峰)이라고 하는데 이 오름과 관련돼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고려 예종때 송나라 호종단이 와서 제주에 명산의 모든 혈을 잘라버리고 떠나던 날 밤 갑자기 솟아나 한라산의 맥이 다 죽지 않았음을 과시했다는것이다.
편백나무숲 쉼터에서 왼쪽 오솔길을 따라가 본다. 절로 가는 길이다. 잡풀더미를 잠시 지나면 이내 소나무 숲길이 나오고 10분쯤 내려가면 구암굴사(제주시 선돌목동길 27-11)가 나온다. 말 그대로 동굴에 사찰이 들어앉은 격이다. 작은 사찰이다. 대웅전도 굴 속에 있다. 오른편에도 굴이 있다. 돌계단이 시작되는 곳에서 부터 촛불이 가득하다. 안으로 내려가 보면 수천개의 촛불을 켜 발원하고 있다. 초는 개당 5000원. 자발적으로 불전함에 넣고 소원을 담아 글씨를 써서 촛불을 켜면 된다. 부처님 앞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마치 생전의 스님이었던 듯, 터줏대감처럼 지키고 앉아 있다.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걸 감지한다. 인사를 건네자 눈만 살짝 깜박인다. 도도하고 시크하다.
세미양오름이라고도 불리는 삼의악오름 편백나무 가지치기를 하는 산림청 직원들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칼다리폭포·노루목·신령바위… 삼의악오름은 인간이 침범하기엔 너무 미안한 원시림짧은 산책로가 조금은 아쉽다면, 삼의악오름(세미양오름)에서 출발해 육각정까지 1.6㎞를 걸어도 좋다. 혹시 큰 맘 먹고 오롯이 호젓하게 숲과 하나되고 싶다면, 삼의악오름 정상에서 왼쪽 길로 내려와 삼의악샘, 고사리평원, 칼다리폭포, 노루목, 신령바위를 지나 관음사로 돌아오는 5㎞가 넘는 역사문화탐방 1코스를 추천한다. 물론 시간 여유가 많아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오후에 나섰다간 어두운 숲길에서 길잃음 사고가 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라동 산 24-2번지에 위치한 삼의악오름(세미양오름)은 산 정상부에서 샘이 솟아나왔다고 해 세미양오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표고는 574.3m, 비고는 139m, 둘레 2473m, 면적 41만 2000㎡에 달한다. 한라산 북녘 자락의 해발 400m 지대에 정좌해 제주시가를 굽어보고 있는 듯한 오름이다. 주차장 입구부터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되지만 삼나무 숲길과 편백나무 숲길을 만나는 순간, 시름이 훌훌 날아가는 듯 하다. 이날은 포레스트 러브 조끼를 입은 산림청(?) 직원들이 편백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적당하게 햇빛이 들어오고 나무와 나무 사이의 숨통을 열어줘 나무가 쭉쭉 하늘로 뻗어나가게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자 육각정 정상이 나온다. 정말 안내판의 소개글처럼 제주시내를 굽어보는 듯한 오름이다. 북쪽으로는 시가지가 아늑한 수평선이, 남쪽으로는 손에 닿을 것 같은 한라산이, 서남쪽은 한라산의 명혈인 개미목으로 이어진다. 풍수지리 형국설에 따르면 삼의악 남쪽 하문형으로 한라산으로 이어지는 대문인 한라산의 조산으로 중요한 혈을 형성한다고 한다.
원정의 산정분화구는 서남쪽 사면에서 오름명의 유래가 되는 샘이 솟아나며 용암 유출 흔적이 있는 작은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단다. 동쪽은 완만한 경사로 해송이 듬성듬성 자라고, 남쪽의 골짜기에는 자귀나무 등 잡목들이 어우러져 있으며 기슭에는 산수국이 군락을 이루고 자생하고 있다.
정상에서 왼쪽으로 내려오는 길에서도 어싱하는 탐방객들이 눈에 띈다. 애완견과 함께 산책나온 가족(고마워요. 길안내해줘서)도 만난다. 내리막길에서 우연히 삼의악샘은 만났는데 기대가 컸는지 실망스럽다. 졸졸졸 물줄기가 내려와 고랑같은 작은 샘에 불과했다. 갈증을 해소하려던 마음이 수포로 돌아간다.
사유지 목장 고사리평원을 지나 하염없이 내려오면 칼다리 폭포를 만날 수 있다. 바위가 빗물에 의해 부서져 내리면서 생긴 모습에 붙여진 이름이다. 평소에는 칼로 자른 듯한 절벽만 볼 수 있지만 비가 많이 온 뒤에는 절벽 아래로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장관을 연출한단다.
폭포는 볼 수 없었지만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용암 절벽과 울창한 자연림이 어우러진 모습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낙하한 물은 생각보다 깊다. 사람 발길도 뜸해 원시의 자연을 만나는 기분이 들 정도로 묘하다.
삼의악오름 정상에서 바라본 첨단과학단지와 제주시내의 모습, 심의악오름에서 내려오는 길에서 만난 심의악샘, 목장, 고사리평원(시계방향). 제주 강동삼 기자
삼의악오름 코스에서 만나는 칼다리폭포의 요암절벽에서 한줄기 물줄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경험을 지도처럼 사용땐 실수 줄어든다… 길잃음 사고 우려에 여럿일땐 ‘강추’, 혼자일땐 ‘비추’초행길이고 홀로 하는 탐방이어서 칼다리폭포를 구경하고 그만 내려갔어야 했지만, 욕심을 내고 관음사 길로 접어든게 낭패였다. 이후 탐방은 자신과의 싸움이 되고 말았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였다. 혹시나 하고 탐방로 입구에서 찍어놓은 지도를 믿고 걸어보기로 한다.
토마소 알비노니(1671.6.8~1751.1.17) ‘아다지오’의 음악이 비장하게 흐르는 영화 ‘맨체스터 바이 더 씨’(케네스 로너건 감독의 2017년作)의 프롤로그에 ‘경험이 내 행동을 결정하는 거야. 경험을 지도처럼 사용하면 실수도 줄어들지’라는 대사가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동안 등산하며 꼭 탐방로 앞에서 표지판 약도를 찍는 습관이 생겼다. 혹시라도 길잃음 사고가 날까봐서다. 여차하면 산속에서 실종될 수도 있어 조심하는 버릇이 생겨나고 있다. ‘올라올 때 찍어놓은 지도를 참고하면 되겠지’ 속으로 되뇌이며 걷기 시작했다.
추석연휴 고향가는 사람들에겐 저마다의 상처가 있기 마련이다. ‘내 안엔 내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가족들에게 항상 까칠하게 대한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영화 주인공 ‘리’(케이시 애플렉·남우주연상)처럼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고향에 온 순간 되살아나는 기억, 밀어냈지만 더 선명해지는 기억 때문에 고향은 늘 그리움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어떤 사람에겐 고향은 ‘알비노니 아다지오’ 처럼 여전한 고통이다. 그래서 걷는지도 모른다. 걷다보면 까칠함이 사라질 지 모르기 때문이다.
탐방길은 길잃음 사고가 날 것 처럼 험하다. 중간 중간 안내하는 리본 표시도 헷갈리고 길도 여러 갈래여서 이러다 실종되는 남자가 되는 건 아닐까 걱정된다. 사진찍고 음악 듣느라 휴대전화 배터리도 한칸 밖에 없다. 바……보.
조심조심 올라가다 보니 노루목이 나왔다. 가파른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가 보니 깊은 산 속 옹달샘을 연상시킨다. 산신령이 살고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 잡힐 정도로 적요하다. 실제 노루 한마리도 만난다. 인기척에 놀라 숲속으로 달아난다.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침범한 사람이 야속한 듯.
원시림 속에 삼의악오름에서 만난 노루목, 신령바위, 관음사와 사찰 안 미륵대불의 모습. 제주 강동삼 기자
바위 길을 따라 걷다보니 어느새 신령바위와 조우했다. 한라산 신령이 서려 있어 두 손을 모아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단다. 나는 이 골짜기를 무사히 빠져나가게 해달라고 얼른 빈 뒤 발길을 재촉한다.
인적이 드문 탐방길. 나홀로 탐방하기엔 부적절해 보이는 코스를 겁없이 들어섰다는 후회가 막심하다. 나홀로 탐방은 절대 ‘비추’다. 권하고 싶지 않다. 지천명의 닳고닳은 남자라서 겁없었다. 무식하게 용감했던 자신을 책망한다.
결국 두 시간 넘게 걸었을까. 학수고대하던 관음사가 저만치에서 아른거린다. 이제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반갑기 이를데 없다. 도내 30여 사찰을 관장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찰인 이곳은 믿음을 떠나 누구라도 한번쯤 들를만한 절이다. 한라산 기슭에 자리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고즈넉함을 간직하고 있다. 사찰의 산문 중 첫 번째문인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으로 가는 길을 곧게 뻗은 삼나무와 더불어 현무암 돌담 위에 자리 잡은 석불과 연등이 운치를 더한다.
조급했던 마음도 다시 평온을 되찾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의 안식을 찾는다. 특히 어머어마한 미륵 대불과 주변 만불상의 모습에 압도됐다. 참고로 허기져서 찾은 관음사 입구 아미헌의 사찰국수는 후하게 점수를 준다면 ‘건강한 맛’이었다.
까칠해지는 자신을 비우는 하루. 자아가 너무 강하면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비워야 채울수 있다. 치유할 수 없을 것 같은 슬픔도 탐방길에 조금씩 아물어간다. 그래도 고향이고, 그래서 고향이다. 고향 밖에 없다.
제주시 선돌목동길 56-26 난타호텔 옆에 자리잡은 난타공연장에서는 매일 오후 4시 30분에 난타공연이 펼쳐진다. 제주 강동삼 기자
난타공연장 입구에 난타공연을 주방도구들로 만들어진 조형물 난타맨이 서 있다. 제주 강동삼 기자
추석연휴 차례상 차리느라 힘든 아내를 위로해주고 싶다면, 난타 공연(매일 오후 4시 30분·송승환 PMC프로덕션 회장)으로 스트레스를 훌훌 날려보내는 건 어떨까.
소산오름 가는 길, 별빛누리공원 옆에 난타호텔과 난타 공연장(제주시 선돌목동길 56-26)이 있다. 1997년 초연한 난타는 1999년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최고 평점을 받았으며 2004년 2월 아시아 공연물 최초로 뉴욕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한 한국 최초의 비언어극이다. 어떤 미사여구도 이젠 필요없을 만큼 세계인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25년 이상 롱런 작품이다. 전세계 59개국 320개 도시 해외공연 투어, 1454만 관객을 훌쩍 뛰어넘고 있단다.
현재 국내에서는 명동극장, 홍대극장, 제주에 상설극장을 운영 중이다. 공연은 시작 10분 전부터 중국인 단체관광객 등 외국인 관광객과 국내 단체, 모임 관람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추석연휴여서 더 단체 관람객이 많은 듯 싶었다.
나이 든 어른들에겐 성룡 주연의 무술영화를 보는 듯한 향수를, 아이들에겐 채플린식 무성영화같은 코미디로 웃음을 선사했다. 어른도 아이도 깔깔 대고 박수치고 환성을 지르는 ‘몰입도와 공감 100%’ 공연이다. 주방의 모든 기구들이 타악기의 재료가 되고 칼과 도마, 음식재료, 심지어 쓰레기통까지 웃음코드로 등장한다. 영화 ‘본 아이덴티티’같은 액션과 결투, 비보이, 탱고, 풍물, 마술 등 온갖 장르가 비빔밥처럼 버무러져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다. 관객과 찰떡 호흡을 자랑하는 명품을 만난 기분이다.
이날 이한범, 권대희, 최두나, 이민우, 남동훈 다섯배우로 앙상블도 기가 막혔다. 보는 내내 그들의 연습한 훈련량과 그들의 체력에 박수가 절로 나올 정도다. 물론 열정은 두말할 필요 없다. 막이 내리자 추석에 생겼던 지친 피로와 스트레스는 가뭇없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