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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의 의(醫)심전심] 진료의 정석/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교수

[김선영의 의(醫)심전심] 진료의 정석/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교수

입력 2022-04-21 20:28
업데이트 2022-04-22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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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교수
김선영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교수
외래진료를 빠르게 보지 못하는 것은 나의 말 못할 고민이었다. 환자의 기본적인 증상만 물어보아도 문답이 시작되면 3분은 넘기게 된다. 증상이 심상치 않은 환자는 진찰을 건너뛸 수가 없는데, 그러다 보면 5분에서 10분까지도 소요된다. 외래진료 전날 그간의 치료과정을 복기하며 향후 계획에 대해 고민해 보지만, 직접 환자를 만나면 원점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경우도 흔하다. 당연하다. 환자는 진료차트 안이나 영상 안에 있지 않으니까.

이러다 보니 3~4시간가량 배정된 외래진료 한 세션에 30명은 빠듯하고, 40명을 보게 되면 시간이 초과돼 환자들의 대기시간은 30분~1시간 정도 늘어난다. 복도에서 기다리는 환자들로부터 불평불만이 터져 나오고, 간호사들은 이들을 달래느라 난감해한다. 같은 시간에 50명, 70명, 많게는 100명까지 보는 다른 의사들도 있는데 나는 겨우 30명 정도를 보며 허덕이니 혼자 ‘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자격지심에 ‘진료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한 팁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서두르느라 정석대로 진료를 한 게 아니지만, 시간을 더 쥐어짜야 했다. ‘정석대로’ 진료를 하는 것이란 학교에서 배운 대로 하는 것이다. 환자의 말을 경청하고, 환자와 눈을 맞추며, 쉬운 말을 사용하고, 환자의 말에 공감을 표시하고 인정하는 것. 의과대학 학생들은 직접 모의환자를 진료하며 이 ‘정석’을 배운다. 의사 국가시험에서는 이 ‘정석대로’ 진료를 하는 것에 환자 한 명당 약 10분의 시간이 주어지고, 그동안의 면담과 진찰을 통해 진단과 치료 계획을 제시해야 한다. 학생들은 이 10분도 짧다며 허덕대지만 실전은 더 빠듯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을 가르친 의대 교수들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우리 의료 현실에서 지킬 수 없는 진료의 ‘정석’ 중에서 나는 딱 하나만 해 왔다. 환자와 눈을 맞추는 것. 진료시간이 짧고 주로 기록과 처방을 챙기느라 모니터를 주로 보지만 적어도 한 번은 눈을 들여다보자는 것이 나의 진료 원칙이었다. 면담과 진찰은 최소로 하더라도 눈을 맞추면 최소한 의사에게 무시당했다는 모멸감은 덜 줄 수 있겠다는 계산에서였다. 그러나 패착이었음을 최근 깨달았다.

환자의 눈을 보는 것조차 생략했던 어느 날, 진료 속도가 놀랄 만큼 향상됐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평소보다 더 많은 환자들을 진료하고도 정시에 마칠 수 있었다. 그들이 말을 멈추어서였다. 그들은 궁금한 것이 있어도 묻지 않았다. 아마 눈을 마주치지 않는 상대방에게 반응을 기대하기 어렵다 판단해서일 것이다. 눈길을 거둔 채 필요한 것만 묻고 답하다가 “안녕히 가세요~”라고 우렁차게 외치면 그들은 머뭇거리며 뒷걸음쳐 나갔다. 아, 이것이구나. 속전속결 진료의 비결이.

환자들이 입을 열어 “의학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그들의 걱정거리나 궁금증을 말하고 이에 대답하는 “거품”이 진료에서 제거되고 나니, 뼈만 앙상한 루틴만이 남았다. 혈액검사를 확인하고 항암제를 처방하는 수초의 시간만이 마우스 클릭과 함께 딸그락거리며 쏜살같이 지나갔다. 아, 눈맞춤을 하지 말아야 하는구나. 눈을 보는 것은 안구를 돌리는 찰나의 시간만 소요되는 것이 아니었다. 눈맞춤은 “나는 당신의 말을 들을 준비가 돼 있다”는 뜻을 전달해 상대방이 말할 용기를 얻게 하고, 그의 입을 열게 한다. 바쁜 진료실에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진료의 정석의 모든 요소를 제거한 초경량, 초스피드 진료를 적용한 이후 나는 40~50명도 3시간에 거뜬하게 볼 수 있게 됐다. 다음엔 70명에도 도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은 환자가 적어 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은 면하게 돼 다행이었다. 아, 나도 남들만큼의 생산성을 지니고 있었구나.

그런데, 난 도대체 무엇을 ‘생산’하고 있는 걸까.
2022-04-22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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