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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의 사피엔스와 마음] 뻣뻣해서 다행이야/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하지현의 사피엔스와 마음] 뻣뻣해서 다행이야/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입력 2022-02-07 20:32
업데이트 2022-02-08 0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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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현 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하지현 건국대 의학전문대학원 교수
피트니스에 등록하고 맛보기로 해 주는 피티를 받았다. 스트레칭 동작을 했는데, 나름 열심히 했지만 트레이너의 “회원님 이게 다예요?”라는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렸다. 부끄러웠지만 어쩌나 현실인데. 내 관절은 무척 뻣뻣하고 이건 20대부터 차이가 없었다. 남들은 허리를 앞으로 굽히면 손목이 발등을 쑥 내려가지만 난 발등을 한 번 찍어 보는 게 소원이었다. 유연한 사람들이 언제나 부러웠다. 필라테스나 요가 선생은 신의 경지로 보인다. 언제나 부러움은 삐딱한 시선을 잉태한다. 내가 잘하는 리서치를 해 보았다. 인구의 20%는 관절의 유연성이 높은 과신전 유형으로 양팔을 뒤로 돌려 맞닿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1988년 스페인 연구진이 관절이 많이 유연한 사람들의 불안장애 비율이 높다는 걸 발견했다. 다른 연구에서도 공황장애가 10배 이상 많았다. 그 이유는 유연성에 있었다. 관절은 유연하게 원하는 동작을 하도록 돕지만 동시에 어느 선에서 멈춰서 구조를 유지하게 한다. 아주 유연하면 기대보다 더 꺾여 일반적 기대보다 더 넘어가고 물리적 멈춤 신호를 느끼지 못한다. 일관되지 않은 한계들은 내부 신호의 민감성을 높이고 외부의 스트레스에도 예민해져서 불안증상이 쉽게 발생한다는 설명이다.

한편 정상의 범위는 타인의 움직임을 보면서도 익힌다. ‘부산행’, ‘킹덤’, ‘지금 우리 학교는’ 모두 K좀비물이다. 좀비를 아무도 본 적 없지만 딱 보면 좀비인 걸 안다. 좀비의 시그니처는 관절의 괴상한 동작이다. 저렇게 꺾이면 아파서 데굴데굴 구르거나 죽어야 하는데 좀비는 살아 있는 듯 사람을 쫓는다. 언캐니한 순간이라 섬뜩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어느 이상으로 관절이 예상 밖 범위로 움직이는 것은 보는 사람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런데 유연성은 몸의 움직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유연함이란 상황에 따라 내 판단을 적절히 바꾸어 대응하는 것과 표현의 가변성에도 쓰인다. 일반적으로는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대처하는 것이 당연히 좋다. 그게 잘 안 되는 사람에 대해선 융통성이 떨어지고 고지식하다고 탓한다. 하지만 몸이 그렇듯 생각이나 표현의 유연성도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요새 대선후보들의 공약이나 발언을 보면 무척 헷갈린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여기서 하는 말과 저기 가서 하는 말에 원칙이 없다. 저 진영에서 할 말이 아닌 것 같은 것도 쉽게 한다. 관절로 치면 여기서 멈춰야 할 것 같은데 그 한계를 넘어가 버린 셈이다. 좋게 보면 유연한 정치적 스탠스지만 보는 사람은 곤혹스럽고 불안을 느낀다. 당선을 위해선 뭐든 말하고 보는 포퓰리즘이란 말이 나온다. 정치란 유연함을 필요로 하지만 리더에겐 일관성과 원칙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래야 기대하고 예측하며 신뢰할 수 있다. 어느 후보건 지지를 하는 마음 뒤에 불안이 담겨 있는 이유는 여기서 온 것 같다. 오랫동안 뻣뻣하다는 평을 받던 후보의 지지가 반등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여기까지 생각이 오고 나니 한심하던 내 뻣뻣한 관절이 꽤 괜찮게 느껴졌다. 자기합리화의 끝판왕이다.

2022-02-08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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