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 쌀 천덕꾸러기 전락해서야/이춘규 논설위원

[서울광장] 쌀 천덕꾸러기 전락해서야/이춘규 논설위원

입력 2010-07-22 00:00
업데이트 2010-07-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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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절정으로 치닫는 7월. 서울에서 열차를 타고 남녘으로 가다 보니 좌우로 넓고 푸른 들판이 계속해서 펼쳐진다. 경지정리가 잘 된 평야지대 논에서는 짙푸른 벼들이 싱싱하다. 3시간 이상을 달려도 좌우 논에 있는 벼들은 생명력이 넘친다. 병든 흔적조차 볼 수 없다. 태풍철이 끝나고, 무더위가 지나봐야 알겠지만 남도 농민들은 올해도 풍년이 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연이은 대풍을 환영해야 하지만 농민들의 표정이 의외로 어둡다. 흉년도 걱정이지만 요즘은 풍년이 더 걱정이라고 한숨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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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규 논설위원
이춘규 논설위원
긴 세월 민족의 생명줄이었던 쌀이 최근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있다. 쌀은 고려시대부터 물가나 봉급의 기준이 될 정도로 귀한 존재였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쌀을 구입하는 것을 ‘쌀을 판다.’고 하는 식의 언어 생활의 흔적이 아직도 여기저기 남아 있다. 어원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지만 분명 인간이 아닌 ‘쌀 중심’의 언어다. 쌀은 이렇게 민족사에서 각별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 쌀의 처지가 급변했다. 가격은 국제수준보다는 여전이 높지만 하락세다. 다른 물가의 상승세와 대비된다. 풍년에 의무 수입쌀 증가, 그리고 소비 부진으로 창고에는 묵은 쌀이 넘친다. 올해 국내 쌀 재고량은 140만t이다. 적정량의 두 배라 저장비용도 엄청나다. 대북 쌀 지원도 막혀 재고를 소진할 길이 안 보인다. 급기야 정부가 재고 쌀 처분책의 일환으로 2005년산 쌀의 가축 사료용 활용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쌀이 천덕꾸러기냐.”는 여론이 일어 시끄럽지만 해법은 요원하다.

쌀은 식량안보의 핵심 작물이다. 각종 지원 정책이 가동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기후나 전쟁 등으로 인한 세계적인 곡물 흉작 사태는 언제든 닥쳐올 수 있다. 많은 학자들은 “식량안보가 군사안보보다 우위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물론 각 국이 비교우위 상품을 교류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식량안보를 과장할 필요가 없다는 반론도 있다. 이런 사람들조차 비상상황 발생시 쌀의 중요성은 인정한다. 그런데도 쌀이나 식량안보 문제는 우리 사회 관심에서 저만치 밀려나 있다.

우리와 쌀·식량 사정이 비슷한 일본의 쌀소비 촉진과 생산기반 유지책은 시사점이 많다. 쌀 소비·수출 촉진책을 가동한다. 민·관이 협력해 다양한 쌀제품을 개발, 위축된 쌀의 소비 확대를 도모하고 있다. 최근에는 노랑, 주황, 파란색 등 이른바 ‘보석쌀’이 개발됐다. 젊은이나 어린이들을 겨냥했다. 미용쌀도 개발하고 있다. 일본 내 최대 쌀 생산지인 니가타현에는 쌀가루를 면류로 개발하는 회사만 80개 이상이다. 쉽게 부러지지 않는 쌀국수도 개발, 지난 4월부터 시판에 들어갔다. 종합상사 등 민간기업들이 브라질, 우크라이나, 인도네시아 등지에 투자해 일본 내 경지면적보다 3배나 넓은 농지를 확보했다. 밀·콩·옥수수 등을 재배, 식량 위기에 대비한다.

일본은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도 손질 중이다. 농지 소유·이용을 분리했다. 청주회사 등 기업도 쌀을 생산할 수 있게 규제를 풀었다. 쌀 생산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우려해서다. 무려 38만㏊(도쿄도 면적의 1.8배)나 되는 경작 포기 농지의 황무지화를 막겠다는 의지다. 식량안보 비상사태에 접어든 뒤에야 쌀 생산 기반 복원을 시도하면 늦다고 판단했다. 마을·들판 단위로 영농규모를 키워 계약재배 등으로 경영도 개선하고 있다. 농업 생산성을 높여 값싼 외국 쌀과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우리나라도 고령화로 농지를 보유·경작할 인구가 줄면서 경작 포기 논이 늘고 있다. 황무지로 변해가고 있다. 그런데 쌀 생산기반은 한 번 무너지면 복원이 어렵다. 쌀이 위태롭다. 논을 농민이나 농업법인은 물론 기업도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정치권의 관심이 절실하다. 쌀농가 지원 정책의 정교화로 도덕적 해이도 막아야 한다. 쌀·식량 안보에 관심을 높이자. 귀한 쌀을 천덕꾸러기 취급하면 쌀의 복수를 피할 수 없다.

taein@seoul.co.kr
2010-07-2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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