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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줄날줄] 붉은광장의 마오쩌둥/박홍환 논설위원

[씨줄날줄] 붉은광장의 마오쩌둥/박홍환 논설위원

박홍환 기자
입력 2015-05-11 18:10
업데이트 2015-05-11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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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이 ‘개국’을 선포한 지 두 달여 만인 1949년 12월 6일 중화인민공화국의 마오쩌둥(毛澤東) 주석이 장장 10여일간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해 모스크바역에 도착했다. 당시 만 56세였던 마오쩌둥은 생애 첫 해외 방문국으로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을 선택했다.

마오는 이듬해 2월 17일까지 두 달 넘게 소련에 체류하며 각종 지원을 이끌어 냈다. 물론 순탄했던 방문은 아니었던 듯하다. 체류가 길어지자 일각에서는 ‘연금설’까지 흘러나왔다. 실제 이오시프 스탈린의 70세 생일 축하대회에 참석, 박수치는 마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중·소 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 차관공여협정 등을 체결하고 당당하게 귀국했다. 스탈린으로서는 사회주의 세력 확대를 위한 마오의 협조가 절실했고, 마오 역시 국가 재건의 재원 마련이 시급해 ‘중·러 동맹’이 불가피했다.

하지만 마오와 스탈린이 30년을 약속한 중·러 동맹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가 집권하면서 두 나라는 ‘동맹’에서 ‘철천지 원수’로 바뀌었다. 마오는 서방과의 관계 개선에 나선 흐루쇼프를 수정주의자로 비난하고, 반대로 흐루쇼프는 마오를 교조주의자라고 몰아붙였다. 양국은 서로를 ‘개’로 지칭하며 헐뜯기 바빴다. 오죽했으면 1957년 11월 2일 생애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가 하루 만에 일정을 마무리했을 정도였을까. 이후 모스크바에서 마오는 금기어가 됐고, 그의 사진 또한 자취를 감췄다. 급기야 두 나라는 1969년 중국 측 헤이룽장(黑龍江)과 러시아 측 우수리강 일대의 섬 관할권을 놓고 치열한 전쟁까지 불사했다.

지난 9일(현지시간) 모스크바의 붉은광장에서는 러시아의 2차대전 승전 7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열병식이 열렸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며 미국·영국 등 서방 대부분 국가 정상들이 불참한 가운데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부인 펑리위안(彭麗媛) 여사와 함께 참석해 ‘중·러 신(新)동맹’을 과시했다. 중국은 역사상 처음으로 인민해방군 의장대를 파견해 행진시키기도 했다. 붉은광장에는 60년 만에 처음으로 군복을 입은 마오의 사진까지 등장했다.

양국의 연대는 1990년대 초 옛소련 체제의 몰락과 함께 재개됐지만 상호견제 속에 조심스럽게 유지돼 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시 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바짝 붙어 열병식을 지켜보는 모습은 66년 전 마오와 스탈린의 관계보다 훨씬 친밀해 보인다. 미국과 일본 간의 신(新)밀월에 대응하겠다는 의지까지 엿보인다. 붉은광장에 다시 등장한 마오는 ‘외교=유기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준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국제 관계의 진리다. 그나저나 우리 외교 당국은 충돌하는 두 체제 사이에서 어떤 ‘카드’를 들고 있는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박홍환 논설위원 stinger@seoul.co.kr
2015-05-1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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