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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 넥스트 데모크라시를 기다리며/장은수 민음사 대표

[열린세상] 넥스트 데모크라시를 기다리며/장은수 민음사 대표

입력 2012-01-12 00:00
업데이트 2012-01-12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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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수 민음사 대표
장은수 민음사 대표
정치의 계절이 다가온 탓인지, 연말과 새해 모임의 화제는 단연 박근혜와 안철수 두 사람의 ‘결심’이었다. 박근혜 위원장이 어떤 방법을 통해 한나라당을 되살릴 것인지, 안철수 원장이 언제, 어떤 모양으로 정치의 전면에 등장할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했다. 결심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 결심을 통해 인간은 과거를 정지시키고, 현재를 변화시키며, 미래를 초대한다. 결단의 순간이 어려운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낡은 삶의 지침을 송두리째 버리고 새로운 삶의 나침반을 갖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한 개인의 결심이 자신을 넘어 사회 전체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릴 때가 있다. 삼봉 정도전이 마흔한 살의 나이로 이성계를 찾아 함경도로 간 순간이 그러했다. 그는 스물한 살의 나이로 국정을 개혁하고,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원하며, 권력의 부정을 일소하려는 야망을 품고 출사했다. 그러나 기존 권문세족과 충돌한 끝에 20년 동안 삭탈관직과 유배를 거듭한 데다, 그 무렵에는 심지어 사는 곳에서 쫓겨나 유랑살이를 하면서 빌어먹기까지 해야 했다. 좌절과 절망이 그를 둘러싸고, 분노와 한숨이 그를 사로잡았다. 마침내 모든 혁명가가 그러했듯이, 정도전은 고려 자체를 버리지 않고는 어떤 미래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 왕조를 열 현실적 힘을 가진 이성계를 찾아간 것이다. 그 순간 신권으로써 왕권을 견제하고 과거를 통해 신권의 독점을 가로막고자 한 정도전 사상의 제도적 실체가 탄생했으며, 붕당제와 관료제라는, 어쩌면 오늘날까지 여전히 끈질기게 작동하는 시스템이 생겨났다.

현재 우리 지도자들이 마주한 순간도 삼봉이 마주했던 것과 같은 심각한 정치적 결단의 때일지도 모른다. 낡아빠진 질서를 수선해서 다시 쓸 것인가, 이를 폐기하고 아예 새로운 질서를 구축할 것인가 하는 절체절명의 선택이 올해 총선과 대선을 앞둔 우리 앞에 놓였다. ‘안철수 현상’이 상징하는 ‘소셜’ 정치의 탄생과 디도스 공격과 돈 봉투 살포로 한계를 드러낸 ‘정당’ 정치의 몰락은 그동안 우리를 지탱해 왔던 시스템의 파멸적 종언을 보여준다. 기존 정당들은 몇 번이나 요술을 부려 이 시스템의 생명을 근근이 이어왔지만, 이번만큼은 이를 연장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 정치를 위협하는 지진해일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이미 다른 모든 분야에서 일어난 혁명이 뒤늦게 정치 자체를 공격하는 구조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정치는 장치산업과 같았다. 먼저 거대한 돈을 들여 대규모 설비투자를 한 후 나중에 상품을 만들어서 이익을 올리는 굴뚝산업처럼 운영된 것이다. 한국정치는 막대한 자금을 들여 구축한 설비, 즉 유지와 관리에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어가는 ‘지구당’이라는 조직을 결코 버리지 못했다. 전국에 실핏줄처럼 퍼진 지역조직을 통해 여론을 조절하면서 표를 이끌어내는 ‘맛’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다. 돈 봉투 살포는 이런 정치 공론장이 사실상 어떻게 유지되는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사건일 뿐이다. 한마디로, 높은 진입 장벽을 이루어서 새로운 정치세력의 등장을 가로막은 것은 ‘돈’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트위터, 페이스북, 팟캐스트 등 네트워크화한 세계에 기반을 둔 새로운 미디어들이 속속 출현하면서 상황이 극적으로 바뀌었다. 공동의 관심사와 가치에 근거를 둔 정치적 동맹을 이룩하고 이를 온라인 미디어 공론장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확산하면서 공유하는 비용이 극적으로 낮아지고 있다. 다른 모든 산업이 그러했듯이, ‘정치 산업’ 역시 네트워크 혁명의 물결에 휩쓸리면서 ‘저비용 고효율’의 혁신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혼수상태에 빠진 정당의 각종 재산이나 헤아리면서 생명 연장장치를 떼지 못하거나, 국민 경선에 돈 봉투를 살포하고도 관행을 빌미로 슬쩍 눙치려 해서는 결코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정치체제, 즉 ‘넥스트 데모크라시’를 상상해 낼 수 없을 것이다.

박근혜와 안철수 등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이 어떤 ‘결심’을 할지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마도 ‘넥스트 데모크라시’를 염두에 두지 않고는 어떤 시도도 헛되게 될 것이다. 권력은 이제 여의도가 아니라 네트워크에 있으니까.

2012-01-12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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