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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세상] 경제민주화의 이름으로…/차은영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

[열린세상] 경제민주화의 이름으로…/차은영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

입력 2013-06-05 00:00
업데이트 2013-06-05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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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은영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
차은영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
예전에 읽었던 책에서 이런 구절이 생각난다. ‘종교가 과연 세상을 구원하는 데 기여했는가.’ 신의 이름으로 구원한 인간보다 종교의 이름으로 살생한 인간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십자군 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이 신의 이름을 걸고 진행되었고 최근 테러에 이르기까지 종교적 요인을 배제할 수 없다.

요새 갑과 을에 대한 논란이 분분하다. 갑이란 본래 가만히 있어도 힘이 있고 대우받는 것인데, 기어이 표나게 과잉으로 갑 노릇 하려다 봉변당한 사람들이 많다. 이런 갑 위에 군림하는 슈퍼 갑들이 경제민주화의 이름으로 양산하는 법안들을 보고 있으면 우려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다. 뜻도 애매모호해서 각자 자기방식으로 해석하는 경제민주화라는 구호 아래 온갖 입법 과잉이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6월 임시국회를 앞두고 여야는 더 독하고 파격적인 법안을 상정하는 경쟁구도를 보이고 있다. 법안의 타당성과 실효성을 제대로 논의하거나 분석하지 않은 채 경제민주화 법안이라는 도장만 받게 되면 반대의견을 여론 재판으로 묵살하고 소통과 의견수렴의 과정 없이 신속하게, 때로는 졸속으로 법안을 쏟아낸다.

근로환경에 엄청난 파급 효과를 초래할 정년연장법을 공청회도 없이 통과시켰다. 근로자의 정년을 3~4년 뒤부터 60세로 의무화하는 정년연장법의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변변한 경과 과정 없이 2016년부터 도입해야 한다. 고용과 임금체계에 커다란 영향을 초래하고 세대 간의 갈등과 경제구조의 변화에 대한 충분한 고려는 어디에도 없었다. 화학물질 유출 사고가 난 기업에 연간 매출액의 5%를 과징금으로 부과하는 법도 일사천리로 통과되어 버렸다.

임시국회가 열리면 대기업 계열사 간 일감 몰아주기와 밀어내기에서 최대 10배까지 징벌적 손해배상을 확대하는 공정거래법 개정안, 산업자본의 은행지분 보유한도를 9%에서 4%로 다시 낮추어 금산분리를 강화하는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 총수 지분이 30%가 넘는 계열사와의 내부거래는 무조건 총수가 관여한 것으로 추정하는 법안 등을 비롯한 소위 경제민주화법안들이 줄줄이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여러 의견을 수렴한 심도 있는 논의와 부작용의 피해를 감안하지 않은 채 반시장적인 규제들을 경제민주화의 이름으로 양산하는 것이 과연 장기적 저성장 국면으로 접어드는 우리 경제에 실질적인 이득을 가져다줄 것인가.

만연한 규제 일변도 논리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동반성장위원회가 발표한 중소기업 적합업종을 보면 역차별의 논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만만한 국내기업만 규제하고 진정한 글로벌 갑은 대상에서 제외한 것이다. 전문성이 떨어지는 영세한 자영업자들의 과잉공급으로 말미암은 폐해와 소비자의 후생 감소는 어떻게 보상할 것인가.

전통시장을 살리려고 대형마켓을 강제로 휴점시키는 규제는 대형마켓이 담당하던 고용을 감소시키면서 전통시장의 매출로 이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동네 편의점의 매출이 증가하였다. 대형마켓이 휴점한 날은 장을 보러 가지 않거나 필수불가결한 아이템은 약간 비싸더라도 접근성이 용이한 편의점을 이용하는 소비자 패턴은 고려하지 않은 전시성 정책 탓이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는 정책을 고집하는 것은 무책임한 것이다.

물론 이런 규제가 나오게끔 일방적 갑 노릇을 해온 대기업과 시장의 책임이 매우 크고 무겁다. 갑이 갖는 권력과 이익을 과도하게 사용해온 결과 자업자득이라는 견해도 일리가 있다. 을이 없으면 갑도 없다는 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면, 동반성장은 규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추구해야 할 명제이다.

규제 하나에 부패가 열이라는 말이 있다.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규제는 그만큼 편법을 부추길 수 있다는 뜻이다. 실패한 정책의 답습보다는 인센티브를 통한 합의에 도달할 수 있도록 틀을 정비하고 설득하는 것이 우선이다. 모든 현상을 법으로 규제하겠다는 발상은 실효성이 없을 뿐 아니라 반민주적이다. 을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미명 아래 갑에게 마구잡이 슈퍼갑질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아귀가 안 맞는다.

2013-06-0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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