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이주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열린세상]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이주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입력 2014-10-17 00:00
업데이트 2014-10-17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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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이주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
“그동안 내가 겪은 심적 고통을 되돌아보면, 학문하는 사람 가운데 나만큼 고통을 겪은 사람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최재석 고려대 명예교수가 2011년에 출간한 회고록 서문에서 한 말이다. 1926년생인 그는 한국사회사와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에 일생을 바쳤고, 제1회 한국 사회학회 학술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는 1959년부터 2012년까지 53년간 연평균 6편 총 324편의 연구논문을 발표했고, 이를 바탕으로 25권의 저서를 출간했다. 논문 수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탁월한 연구 업적이다.

1980년대에 들어 고대사회사 연구의 선행 작업으로 일본인들이 연구한 한국고대사를 검토하기 시작한 그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한국 고대사회사를 연구하기 시작한 사람도 그 연구를 계속한 사람도 모두 일본인들이며 한국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조작되었다”는 한결같은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는 일본인들이 한국 고대사회사 연구와 일본 고대사 연구에서 한국 고대사의 기본서인 ‘삼국사기’는 조작되었으며, 고대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반복적으로 주장하는 것에 주목했다.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의 장도에 오른 그는 마침내 일본 고대사의 기본서인 ‘일본서기’ 기록에서 일본(야마토 왜)은 시작 초기부터 백제가 경영하는 직할 영토였음을 발견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고대사학자들이 모두 이구동성으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조작됐고, 고대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간파한 것이다. 그는 일본인 사학자들이 ‘일본서기’의 내용을 은폐하기 위해 그 반대의 주장을 해왔다는 점을 치밀하게 논증했다.

그가 1985년에 발표한 기념비적인 논문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과연 조작된 것인가’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계를 발칵 뒤집어놓는 것이었다. 그는 이병도·이기백·이기동씨 등 한국 고대사학자들이 일본인 사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조작됐다고 주장하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쓰다 소키치, 이마니시 류, 이케우치 히로시, 스에마쓰 야스카즈 등 일본인 학자 30명의 주장을 엄밀하게 검증했다. 최 교수의 엄격한 분석과 문헌 연구는 세계적인 수준이다. “일본서기의 허구·왜곡의 정도도 심하지만 일본 고대사학자들의 왜곡·허구 주장은 일본서기의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그 정도가 심하다.” ‘일본서기’의 왜곡·허구 기사와 사실 기사를 구분하고 중국과 한국의 관련 사료들을 모두 검토한 그가 한 말이다.

그러나 최 교수의 공개적인 질의에 대해 한국 고대사학계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비판해 달라. 근거를 제시하라. 한마디 정도의 논평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등 그가 던진 질문은 30년째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됐다. 그의 연구는 실재하지 않는 유령 취급을 받았다. 현재 한국사 교과서는 물론 대부분의 한국사 저작들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조작됐다는 일본사학자들의 견해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최 교수의 연구에 많은 영향을 받은 세키네 히데유키 가천대 교수는 수년 전에 그의 책 7권을 들고 도쿄의 여러 출판사를 찾아갔다. 10개 출판사 모두 출판사로서는 탐이 나는 책이지만 만일 출판되면 일본 우익단체의 테러 위험성이 있다는 이유로 출간을 고사했다고 한다. 일본은 침략주의를 고수하는 천황제 국가라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어찌 된 일일까. 최 교수는 이를 점잖게 표현해서 “불가사의하다”고 했지만 막강한 학문 카르텔과 이권 개입을 그가 모를 리는 없다.

그에게 한국사 사실(史實) 연구는 파란만장한 고난을 자처한 길이었다. 구순을 앞둔 그는 자신이 겪은 역경과 고통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됐다고 한다. 역경을 집념 어린 학문의 자양분으로 승화했기 때문이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근래에 식민사학에 대한 비판 여론이 저변에서 꿈틀대고, 그의 연구 업적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그가 필자에게 고백한 말이다. 그는 2011년 ‘고대 한·일관계와 일본서기’를 영국 바드웰 출판사에서 영문으로 출간했다. 한·일고대사의 진실을 세계학계에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2014-10-17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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