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요일은 토요일이다. 토요일이란 무엇인가? 토요일은 학교에 처음 다니기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내게 최고의 날이었다. 그것은 일요일보다 훨씬 멋진 날이다. 일요일은 휴일이지만, 바로 그 다음 날부터 시작하는 노동의 일주일을 예고하기에 마음이 무거운 하루였다. 반면 토요일은 일요일이라는 광대한 자유를 앞에 두고 있는 예외적인 시간, 희망과 자유와 축제의 날이었다. 그것은 다른 여섯 날 동안 숨어 있던 모든 기쁨이 등장하는 시간이다.
토요일만이 지니는 특별한 들뜬 분위기는 문학 작품들 속에서도 확인되는데, 가령 하루키의 대표작 ‘노르웨이의 숲’의 주인공은 썸 타는 여인을 토요일에 이렇게 기다리기도 한다. “토요일 밤이 되면, 나는 전화기가 있는 현관 로비의 의자에 앉아서 나오코의 전화를 기다렸다.” ‘노르웨이의 숲’의 중요 키워드는 토요일이다.
미신이 유행이니까 우리도 천문학보다는 점성술의 어법으로 말해보자. 토요일은 사투르누스 신의 날이다. 이 신의 영어식 표기가 새턴이고 새턴의 날이 새터데이, 토요일이다. 그리고 사투르누스, 즉 새턴은 토성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에 대응하는 로마 신 사투르누스는 매우 접근하기 어려운 신이다. 너무도 다양한 성격을 지닌 이집트의 세트만큼이나 복잡하고 까다로운 신이라 할 수 있다.
사투르누스의 복잡한 성격은 그가 서로 대립하는 영혼들로 이루어진 데서 기인한다. 발터 베냐민이 ‘독일 비애극의 원천’(최성만·김유동 옮김)에 쓰고 있는 것처럼, 사투르누스는 ‘우울함’과 ‘광적인 황홀감’이라는 두 개의 영혼을 가졌다. 이 사실은 벌써 사투르누스의 날이 우리의 토요일 자체임을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토요일 광화문 앞에서 우리는 통치자 때문에 우울하고, 촛불 때문에 황홀하다.
사투르누스가 이중적인 만큼 이 신의 기원인 그리스 신 크로노스 역시 이중적이다. 크로노스는 지배자이기도 하지만 왕위를 잃는 신이기도 하다. 파노프스키가 말하듯 그는 “서투른 쾌락에 속아 넘어가는 흉물이자, 대단히 영리한 자”이기도 하다.
고대 신앙의 중심에는 사투르누스가 있다. 사투르누스는 크로노스와 마찬가지로 시간을 지배하기에 당연히 일 년 열두 달의 지배자이다. 그런데 일 년 열두 달을 지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어진 시간 동안 거두어들이는 수확을 지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토요일의 신은 단지 곡물만을 수확하는 게 아니다. 너는 너에게 맡겨진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가 질책하며, 인간도 수확한다. 베냐민의 표현을 빌리면 사투르누스는 “더이상 곡식이 아니라 인간을 거둬들이는 데 필요한 낫을 갖고 죽음을 수확하는 자가 되었다.” 그는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따져 묻는 판관처럼 인간을 수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토요일의 신은 낫 대신, 더 무서운 촛불을 들고 있다. 토요일은 바로 너울대는 광선 검, 촛불이 수확하는 날인 것이다. 사투르누스는 우리들의 토성 요일에 대해 또 귀띔해 준다. 베냐민이 길로우를 인용하며 말하듯 사투르누스의 행성, 즉 토성은 고대의 관념에서 ‘가장 높이 떠 있고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먼 행성으로서, 모든 심오한 명상의 주창자로서 영혼을 계속해서 더 높은 곳으로 고양해 결국에는 지고한 지식과 예언적인 재능을 부여하는’ 별이다.
이제 알겠다. 왜 일상생활의 천편일률적인 연속이 갑자기 중지될 수밖에 없는 토요일이라는 놀라운 하루가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모두 일상이 정지할 수밖에 없는 일주일의 예외적인 하루, 사투르누스의 날을 지금 가장 그날답게 살고 있는 것이다. 토요일이 다른 모든 요일을 먹여 살릴 것이다.
토요일은 심오한 명상의 산물이며, 우리 모두를 높은 곳으로 고양하는 날이자, 무엇보다도 장차 도래해야만 하는 일을 예언적으로 알려주는 날이다. 토요일의 국민은 앞으로 어떤 사건이 도래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운명의 고지자이자 참다운 지식 자체, 진리인 것이다. 이 진리가 탄생하기 위해 여섯 날이 토요일 앞에서 멈춘다. 그러니 진리에 눈을 열라. 우리에겐 11월 26일도 예외 없는 토요일, 필연적인 하루다.
서동욱 서강대 철학과 교수
미신이 유행이니까 우리도 천문학보다는 점성술의 어법으로 말해보자. 토요일은 사투르누스 신의 날이다. 이 신의 영어식 표기가 새턴이고 새턴의 날이 새터데이, 토요일이다. 그리고 사투르누스, 즉 새턴은 토성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에 대응하는 로마 신 사투르누스는 매우 접근하기 어려운 신이다. 너무도 다양한 성격을 지닌 이집트의 세트만큼이나 복잡하고 까다로운 신이라 할 수 있다.
사투르누스의 복잡한 성격은 그가 서로 대립하는 영혼들로 이루어진 데서 기인한다. 발터 베냐민이 ‘독일 비애극의 원천’(최성만·김유동 옮김)에 쓰고 있는 것처럼, 사투르누스는 ‘우울함’과 ‘광적인 황홀감’이라는 두 개의 영혼을 가졌다. 이 사실은 벌써 사투르누스의 날이 우리의 토요일 자체임을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토요일 광화문 앞에서 우리는 통치자 때문에 우울하고, 촛불 때문에 황홀하다.
사투르누스가 이중적인 만큼 이 신의 기원인 그리스 신 크로노스 역시 이중적이다. 크로노스는 지배자이기도 하지만 왕위를 잃는 신이기도 하다. 파노프스키가 말하듯 그는 “서투른 쾌락에 속아 넘어가는 흉물이자, 대단히 영리한 자”이기도 하다.
고대 신앙의 중심에는 사투르누스가 있다. 사투르누스는 크로노스와 마찬가지로 시간을 지배하기에 당연히 일 년 열두 달의 지배자이다. 그런데 일 년 열두 달을 지배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주어진 시간 동안 거두어들이는 수확을 지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데 토요일의 신은 단지 곡물만을 수확하는 게 아니다. 너는 너에게 맡겨진 시간 동안 무엇을 했는가 질책하며, 인간도 수확한다. 베냐민의 표현을 빌리면 사투르누스는 “더이상 곡식이 아니라 인간을 거둬들이는 데 필요한 낫을 갖고 죽음을 수확하는 자가 되었다.” 그는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따져 묻는 판관처럼 인간을 수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토요일의 신은 낫 대신, 더 무서운 촛불을 들고 있다. 토요일은 바로 너울대는 광선 검, 촛불이 수확하는 날인 것이다. 사투르누스는 우리들의 토성 요일에 대해 또 귀띔해 준다. 베냐민이 길로우를 인용하며 말하듯 사투르누스의 행성, 즉 토성은 고대의 관념에서 ‘가장 높이 떠 있고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먼 행성으로서, 모든 심오한 명상의 주창자로서 영혼을 계속해서 더 높은 곳으로 고양해 결국에는 지고한 지식과 예언적인 재능을 부여하는’ 별이다.
이제 알겠다. 왜 일상생활의 천편일률적인 연속이 갑자기 중지될 수밖에 없는 토요일이라는 놀라운 하루가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모두 일상이 정지할 수밖에 없는 일주일의 예외적인 하루, 사투르누스의 날을 지금 가장 그날답게 살고 있는 것이다. 토요일이 다른 모든 요일을 먹여 살릴 것이다.
토요일은 심오한 명상의 산물이며, 우리 모두를 높은 곳으로 고양하는 날이자, 무엇보다도 장차 도래해야만 하는 일을 예언적으로 알려주는 날이다. 토요일의 국민은 앞으로 어떤 사건이 도래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운명의 고지자이자 참다운 지식 자체, 진리인 것이다. 이 진리가 탄생하기 위해 여섯 날이 토요일 앞에서 멈춘다. 그러니 진리에 눈을 열라. 우리에겐 11월 26일도 예외 없는 토요일, 필연적인 하루다.
2016-11-24 30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