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여행 속 핵심동력은 결국 ‘백마 탄 왕자’ 신드롬

1990년대의 풍경을 이처럼 세밀하게 묘사하고 끄집어내 공감대를 형성한 드라마는 이전까지 없었다.

아이돌그룹 팬덤의 태동기 속칭 ‘빠순이’들의 일상과 마음을 이처럼 적극적이고 실감 나게 그려낸 작품도 없었다.

‘응답하라 1997’
또한 부산사투리 중에서도 강도가 센 해운대·기장 사투리를 걸쭉하게 구사하는 여주인공이 영화가 아닌 드라마에서 전혀 거리낌 없이 목소리를 드높였던 것도 처음이다.

화제의 드라마 tvN ‘응답하라 1997’이 깃대를 꽂은 전인미답의 영역들이다.

동시에 극이 주 배경으로 삼은 1997년 중고교를 다녔던 시청자의 ‘심금’을 정조준해 아련한 추억여행을 성공적으로 이끈 보석같은 설정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한꺼풀을 걷어내 보자. ‘응답하라 1997’의 신드롬이 회를 거듭할수록 거세질 수 있었던 데는 결국 영원한 흥행공식인 신데렐라 판타지가 자리하고 있다.

다만 그 상대가 어느 날 갑자기, 우연히 엮이게 된 재벌 2세가 아닐 뿐이다. ‘OO친구’라고 말하는 소꿉친구로 태어나면서부터 알았고 이웃에 살며 아니, 아예 한가족처럼 살며 커가는 과정을 매일같이 지켜봐 준 친구가, 또 그 형이 상대라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단순한 소꿉친구는 아니다. 공부 못해 하와이로 도피성 유학을 하거나 수능성적이 88점에 머문 케이스가 아니다. 소꿉친구 윤윤제(서인국 분)는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입학해 훗날 대쪽 판사가 되는 수재고, 그 형 태웅(송종호)은 과거 학력고사 전국수석을 차지했던 인물로 현재 성공한 벤처기업가이자 유력 대선후보다. 게다가 둘 다 준수한 외모를 자랑한다.

반에서 꼴찌를 하고 H.O.T, 그중에서도 토니안의 ‘빠순이’인 데다 못생기고 성질 사나운 여주인공 성시원(정은지)에게는 ‘백마탄 왕자님’과 동급이다.

심지어 이 두 왕자는 ‘부산 광안고 최고의 또라이’로 꼽히는 성시원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지켜봐 주고 공유하며 사랑해준 막강 내공과 역사를 자랑한다.

’응답하라 1997’은 매회 과거와 2012년 현재 고교 동창회를 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교차하면서 현재 성시원이 결혼해 임신 중인데 그 남편은 아직 공개하지 않는 전법으로 시청자의 궁금증을 ‘심하게’ 자극한다.

특히 남편 후보로 윤제와 태웅의 얼굴을 잇따라 클로즈업하는 제작진의 전술은 ‘연애 밀당의 고수’를 무색하게 한다.

지난 28일 방송된 11-12화가 자체 최고인 평균 시청률 3.46%, 최고시청률 4.43%(TNmS 기준)를 기록하고 이로써 이 드라마가 케이블채널 동시간대 1위를 6주 연속 지키게 된 데는 이러한 신데렐라 판타지가 한가운데에 놓여있다.

’응답하라 1997’의 친구들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외쳤지만 현실은 그런 핑크빛 표어와 사뭇 다르고, 실제 성시원 같은 스펙의 여성이 윤제나 태웅의 혼을 빼앗을 확률도 상당히 낮다.

윤제와 태웅은 성시원을 ‘못생겼다’고 인정하면서도, 왜 좋아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이쁘잖아”라는 한마디로 모든 상황을 정리해버린다.

성시원이 이 두 천재 훈남 형제를 사로잡은 비결은 결국 ‘스펙’을 넘어 그의 전 인생을 가감없이 보여주며 가랑비에 옷이 젖듯 감동을 전해준 덕분이다.

이보다 더한 판타지도 없다. 남녀 주인공을 극과 극에 배치하고 특히 여성이 온갖 약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모든 것을 가진 선망의 남성이 여성에게 순애보를 바치는 스토리는 순정만화 속 세상이다.

’응답하라 1997’이 여자 10-40대, 남자 10-20대와 40대 연령층에서 모두 동시간대 케이블 시청률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특히 20-30대 여성 시청층 사이에서는 최고시청률이 5.9%까지 치솟는 것은 이러한 판타지에 대한 여성 시청자들의 응답이다.

성시원은 이른바 ‘88만원 세대’나 화려한 스펙을 갖지 못한 청춘들, 특히 여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며 잠시나마 고단한 현실을 떠나 꿈에 취하게 한다. ‘닥치고 마음껏 취하라’는 주문과도 같다.

1990년대의 추억에만 젖어서는 드라마에 대한 관심은 불과 몇 회 가지 못했을 것. 시원의 대사처럼 시원과 윤제는 가장 쉬운 관계인 친구에서 가장 난도가 높은 남녀 관계로 넘어갔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던 것이다.

특히 시원이 결코 ‘캔디형 인간’이 아니라는 점은 여성들에게 최소한의 부담마저 덜어준다. 극에서는 시원이 내내 꼴찌를 하고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내다 ‘글발’이 좋아 특별전형으로 대학 국문과(그것도 서울에 있는)에 극적으로 입학하는 것으로 그렸지만 현실에서는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려운 게 사실이다.

드라마는 시원이 늘 노력하고 자립하는 ‘캔디형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받을만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성시원이기에 사랑받는 것이고 그럴 수 있다고 밀어붙인다. 그래서 여성들은 더 열광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고 진가를 알아봐 줄 훈남에 대한 기대가 이 드라마 인기의 동력인 것.

그리고 그 훈남이 내가 자라고 여자가 돼가는 모든 과정을 지켜봐 준 소꿉친구라는 점은 내 지난날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커다란 위로가 되기도 한다.

지나간 것들을 공유하며 언제든 함께 꺼내볼 수 있는 소꿉친구가 연인으로 바뀌는 과정은 ‘응답하라 1997’이 안내하는 추억 여행의 핵심이자 강력한 판타지인 것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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