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번째 영화 ‘전설의 주먹’으로 감독 승부수

“이번에는 배우, 평단 등 그 누구의 눈치도 안 보고 현장을 즐기던 신인 감독 시절로 돌아가 영화를 찍었습니다. 그 결과도 제가 받아들여야겠죠.”

영화 ‘강철중’ 이후 5년 동안 슬럼프에 시달렸다는 ‘충무로의 승부사’ 강우석 감독이 ‘전설의 주먹’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현장을 즐기던 신인 감독 시절로 돌아가 영화를 찍었다”면서 “(30년간 영화를 찍었는데도) 아직 만족하는 영화를 못 찍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강한 의욕을 보였다.<br>도준석 기자 pado@seoul.co.kr
‘충무로의 승부사’ 강우석(53) 감독. 지난 2008년 영화 ‘강철중:공공의 적 1-1’(이하 ‘강철중’)로 위기에 직면한 한국 영화계의 구원투수로 등판했던 그는 이번에는 자신의 19번째 영화 ‘전설의 주먹’(10일 개봉)으로 감독으로서의 승부수를 띄웠다.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실미도’의 연출자이자 ‘왕의 남자’의 제작자인 그는 ‘투캅스’, ‘마누라 죽이기’ 등으로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주인공이다. 하지만 최근 충무로의 시네마서비스 사무실에서 만난 강 감독은 ‘강철중’ 이후 5년 동안 극심한 슬럼프에 시달렸다고 털어놨다. 영화 ‘이끼’로 각종 영화제의 상을 휩쓸었지만 답답함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강철중’을 만들어 놓고도 ‘공공의 적’ 1편을 우려먹는다는 생각에 답답했습니다. 발전하고 변신해야 하는 시기에 시리즈를 이용해 돈벌이한다는 생각에 괴로웠죠. 점차 전투력을 잃어버리고 평단의 눈치와 결과에 연연해 자신을 검증하고 현장에 짓눌린 제 모습을 보았어요. 그러면서 영화가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했던 거죠.”

두통약을 먹을 정도로 심적 고통에 시달렸다는 강 감독은 ‘내려놓음’에서 해답을 찾았다. 점점 엄숙해지던 그는 자신에게 ‘영화는 흘러가고 지나가는 것인데 너무 연연하지 말자. 남들이 어떻게 보건 말건 내가 재밌고 내 식대로 영화를 찍었던 과거로 돌아가자’는 결론을 내렸다.

시네마서비스 제공
2년 전 자신의 치유를 위해 휴머니즘 영화 ‘글러브’를 연출했다는 강 감독은 ‘전설의 주먹’을 통해 그동안의 슬럼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그는 현장에서 배우들과 스태프를 웃기고 직접적인 소통을 즐겼던 예전 ‘강우석’으로 돌아갔다. 배우들에게도 모니터 화면을 보여주지도 않고 “일단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나를 믿고 따라오라”고 말했다.

그렇게 탄생한 ‘전설의 주먹’은 강우석 감독 특유의 돌직구형 연출 스타일에 현대적인 감각이 덧입혀졌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학창 시절 전설적인 존재였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힌 세 친구가 TV로 중계되는 ‘파이트쇼’에 출전하면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내용이다. 한때 복싱 챔피언을 꿈꿨지만 딸 하나만 바라보고 사는 임덕규(황정민), 가족과 성공을 위해 자존심마저 내팽개친 대기업 샐러리맨 이상훈(유준상), 남다른 독기와 근성이 있었지만, 삼류 건달로 전락한 신재석(윤제문) 등 세 명이 주인공이다. 복고 열풍을 일으켰던 ‘써니’의 남성판으로 불리기도 한다. 강 감독은 이 영화가 우리 시대의 가장들을 위로하는 만큼 자녀 세대가 꼭 봐야 하는 영화라고 강조했다.

“시사회 때 눈물을 흘리는 남성 관객들을 많이 봤습니다. 극 중 인물들은 양극화된 사회 속에서 권력이나 돈으로부터 할큄당하고 밟히는 4050세대를 대표합니다. 사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자본과 직위에 눌리고 집에서는 점점 존재감이 없고 무력해지는 것이 이 시대의 아버지들인 것 같아요. 주인공들이 다시 경기장으로 나오는 것처럼 많은 분이 영화를 통해 용기를 얻고 힐링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는 이 영화에 아버지이자 영화 제작자로서 자신의 모습도 투영했다고 말한다. 강 감독은 올해로 20년을 맞은 영화 제작·투자·배급사 시네마서비스의 대표이다. “저 역시 영화를 만들려면 자본에 무릎을 꿇어서라도 투자를 받아내야 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 돈의 횡포에 대해서 잘 압니다.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면서 제가 겪었던 외로움도 영화에 담았죠.”

강 감독은 한 해에 1000만 관객 영화가 두 편이나 나올 정도로 한국 영화가 성장하는 데 대해 “20년 전 ‘투캅스’를 보면서 한국 영화가 외화 못지않은 재미를 가졌다는 것을 알게 된 당시 2030세대들이 4050세대가 된 지금도 영화를 즐기면서 관객층이 넓어졌다”면서 “앞으로 1000만명 돌파는 일상적인 일이 되고 이런 추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쓴소리도 잊지 않았다.

“요즘 영화는 크게 거슬리지 않는 웰메이드(well-made)영화가 많지만 두루뭉술하고 도식화된 작품들뿐입니다. 조금 투박하더라도 끝까지 감정을 물고 늘어지는 날카롭고 튀는 감각의 독특한 영화가 없어요. 관객을 콱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집요함이 부족한 것 같아요.”

‘투캅스’와 ‘실미도’를 연출하고 ‘왕의 남자’의 제작자로서 번 돈을 20여편의 영화의 제작에 원 없이 쏟아부었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는 강 감독. 최근 유아인 주연의 ‘깡철이’의 제작을 마친 그는 “앞으로 배급보다 좋은 영화의 제작과 투자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직도 보고 싶은 영화가 있으면 한달음에 극장을 찾는다는 그가 여전히 현역을 누비는 원동력은 무엇일까.

“딴 곳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고 30년간 영화에 빠진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요. 그동안 200번이 넘게 대학 강단에 서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지만 한 번도 응하지 않았어요. 현장을 지키는 감독이 있는 한 그 분야는 죽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이죠. 전 아직도 제가 만족하는 영화를 못 찍고 있다고 생각해요. 충무로에서 버틸 겁니다.”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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