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기념 콘서트 앞둔 밴드 ‘부활’

“30주년이 되니 ‘부활’이라는 두 글자가 얼마나 거룩한 이름이었는지 새삼 깨닫게 돼요. 그동안 누군가를 위해 존재한 만큼 나누고 돌려줘야 할 이름이라고 생각해요.”(김태원)

밴드 ‘부활’


 
 


 
 
30년 전 언더그라운드에서 ‘디 엔드’(The End)라는 팀으로 활동하던 김태원이 김종서를 보컬로 영입하고 팀 이름을 ‘부활’로 바꾸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의 ‘부활’을 만나지 못했을지 모른다. 1985년 7월 3일 결성한 ‘부활’은 그 이름처럼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록그룹으로는 드물게 30년간 꿋꿋이 버텨왔다. 그동안 ‘희야’, ‘비와 당신의 이야기’, ‘마지막 콘서트’(회상3), ‘사랑할수록’, ‘네버 엔딩 스토리’ 등 1980~2000년대 대중가요사의 한 획을 긋는 명곡이 그들을 통해 탄생했다.

디너쇼할 나이지만… 신선한 록음악 보여줄 것

지난 7일 밤 서울 영등포구 당산동의 한 합주실에서 만난 이들은 열흘 앞으로 다가온 30주년 기념 콘서트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리더인 기타리스트 김태원, 채제민(드럼), 서재혁(베이스)과 최근 새로 영입된 보컬 김동명은 요즘 매일 새벽 2시까지 연습을 하면서 부활의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고 있다. 채제민은 1998년, 서재혁은 1999년부터 ‘부활’과 함께했다. 해체 위기 속에서도 ‘부활’이 30년간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뭘까.

“16년 전 처음 ‘부활’에 들어왔을 때보다 지금 더 신선하다고 봐 주세요. 아마 록밴드로서 우리만의 색깔 있는 음악을 해 왔기 때문일 겁니다.”(서재혁) “보통 가수들이 데뷔 30주년이면 디너쇼를 여는 게 보통이죠. 하지만 우리는 오래된 밴드가 아닌 영원한 젊은 그룹으로 남고 싶어요.”(채제민)

김태원은 자신들의 음악을 사랑해 준 팬과 관객들에게 공을 돌렸다.

“바람과 나무처럼, 바다와 해변처럼 관객이 존재해야 음악하는 사람이 노래할 수 있어요. 그러면서 위로를 주고받는 것이죠. 서로가 서로를 원할 때 생기는 에너지와 조화가 30년 동안 음악을 해 온 원동력이라고 생각해요.”(김태원)

역시 달변이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개성적이면서도 포용력 있는 화법으로 인기를 끌어온 그답다. 그는 “20주년 때의 인터뷰를 보면 무슨 넋두리를 하는 것 같다. 그때는 팀 분위기도 어두웠고 화면으로 보면 건강도 조금 안 좋아 보인다”며 웃었다. 강산이 세 번 변하는 시간 동안 ‘부활’은 어떻게 변했을까.

피고 지고 다시 피고… 낙엽 같던 시절 많아

“우리는 매번 초반에 확 피다가 지는 세월을 반복했어요. (1, 2집이 히트했던) 초반 10년도 처음에 잠깐 확 꽃이 폈지만 나머지 7년은 힘들었구요. 그다음 10년에도 처음 2년 정도 만개하다 바로 졌어요. 마치 길거리의 젖은 낙엽 같았던 시절이 많았죠. 그다음 10년은 제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한 5년 정도는 시들지 않는 꽃처럼 꽤 오래갔죠.(웃음)”

밝음 뒤의 어두움은 더 짙었다. 2002년 이승철이 보컬로 재합류해 발표한 8집 앨범 타이틀곡 ‘네버 엔딩 스토리’가 히트를 치면서 다시 부활했지만 척박한 국내 가요 시장에서 록밴드가 버티기는 쉽지 않았다.

“‘네버 엔딩 스토리’ 이후 2004년 1만여명의 관객 앞에서 공연했을 때를 지금도 잊지 못해요. 하지만 이듬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대학로의 100석짜리 소극장에서 공연을 했죠. 하지만 아쉽지는 않았어요. 2009년 ‘생각이 나’라는 곡으로 700~800명석 규모의 공연장으로 조금씩 늘려갔죠.”

‘아들뻘’ 새 보컬 김동명… 故김재기 목소리 닮아

1년에 행사 스케줄이 고작 두 번일 때도 있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팀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음악에 대한 절박함 때문이었다. 김태원은 “음악에 갇혀 있고 고립됐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냐”고 반문했다. 검은색 선글라스 뒤로 진정성이 느껴졌다. 다른 멤버들은 김태원의 리더십에서 이유를 찾았다.

“집의 기둥이 튼튼하면 오래갈 수 있잖아요. 아버지가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집안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데 태원이 형은 굉장히 강인한 아버지이자 튼튼한 버팀목이었어요.”(채제민)

“태원이 형은 처음부터 리더로 태어난 사람 같았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학교 강의나 영화 음악, 다른 가수의 세션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유연한 리더십을 발휘했죠.”(서재혁)

지난해 팀을 떠난 정동하의 뒤를 이어 들어온 신인가수 김동명에게 김태원은 스승 같은 존재다. 중학교 때 ‘희야’를 좋아했다는 그의 아버지와 김태원은 동갑이다. 김태원은 “김동명 역시 음악적 동반자”라고 말한다. 김태원의 삶에도 만만찮은 굴곡이 있었다. 1993년 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3집 앨범 타이틀곡 ‘사랑할수록’을 부른 보컬 김재기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성격은 180도 바뀌었다. 그는 “내가 죽을 뻔하거나 누군가 죽는 충격을 경험하면 그렇게 된다. 80년대에는 휘어지지 않는 철근처럼 고집이 강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부드러운 것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태원 “내가 노래했다면 이승철·정동화 없지”

1980년대 록그룹 ‘백두산’, ‘시나위’ 등과 함께 국내에 헤비메탈 유행을 주도하던 ‘부활’이 3집 이후 다소 부드러운 록발라드적인 성향으로 변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지금까지 이승철을 비롯해 김재희, 박완규, 정동하 등 총 9명의 보컬이 ‘부활’을 거쳐갔다. 새로 발탁된 김동명은 “곡의 절정에 다다랐을 때 고 김재기와 음색이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보컬이 자주 바뀌는 것이 팀 색깔을 약화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만일 김태원이 에릭 클랩턴처럼 노래를 좀 더 잘했다면 ‘부활’은 달라졌을까.

“제가 노래를 잘했다면 이승철이나 고 김재기, 정동하는 지금 존재하지 않았겠죠. 한 사람이 모든 걸 다 갖고 있다면 너무 심심하고 식상하지 않나요? 제가 작곡을 하고 기타를 치는데 노래는 못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해요.”

그러고 보니 작곡이나 작사를 따로 배우지 않고 그저 가슴 아팠던 느낌을 적다 보니 명곡이 나왔다는 그가 노래까지 잘했다면 불공평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그에게 작곡은 괴롭지만 여전히 ‘할 만한 게임’이다. 그는 종종 제기되는 이승철과의 불화설에 대해서는 ‘아름다운 관계’라고 일축했다. 그는 “이승철은 내가 발굴한 사람이고 그 역시 ‘부활’에서 한 업적이 많은데 서로 아쉬우면 안 된다”면서도 “내가 속이 좁아서인지는 몰라도 그가 불편해 할까 봐 30주년 기념 콘서트 출연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밴드 있어야 음악 발전… 한국의 ‘롤링스톤스’ 꿈

오는 16일 서울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열리는 ‘부활’ 30주년 기념 콘서트는 그들이 지나온 30년을 한 편의 영화처럼 담을 예정이다. ‘부활’을 거쳐간 보컬들이 출연하고 오프닝에는 김태원의 딸이 공연한다. 하반기에는 미니 앨범을 내고 내년에는 30주년 앨범을 낼 계획인 이들은 올해 50주년을 맞은 ‘롤링스톤스’처럼 롱런하는 밴드가 되는 것이 꿈이다.

“밴드가 존재하지 않으면 대중음악은 큰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고 봐요. 저도 기타 솔리스트 레이프 개릿이 아니라 ‘비틀스’나 ‘레드 재플린’ 같은 밴드를 보고 음악을 연구했으니까요. 내년이면 환갑인데 어느 상황에서건 음악을 하고 있을 겁니다. 부활은 언제나 부활하고 싶은 그룹이니까요.”(김태원)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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