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 이외의 인종이었던 배역을 백인으로 교체해 ‘화이트워싱’ 논란이 일었던 영화들. 왼쪽부터 영화 ‘드래곤볼 에볼루션’ , ‘론 레인저’ , ‘갓 오브 이집트’.
고전 서부극 ‘황야의 7인’의 리메이크 작품 ‘매그니피센트 7’가 출연 배우들의 인종 다양성으로 주목 받고 있다. 실제 서부 개척시대에 미 대륙에는 여러 인종이 몰려들었었다는 점에 착안, 원작과 달리 동양인, 아메리카 원주민, 멕시코인 배우 등을 주역으로 캐스팅한 안톤 후쿠아 감독의 참신한 시도는 이른바 ‘화이트워싱’ 관행으로 늘 논란을 빚는 미국 영화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화이트워싱(Whitewashing)의 오랜 역사

‘화이트워싱’은 백인이 아닌 배역을 백인 배우에게 맡기는 미국 영화산업의 오랜 제작관행이다. 흔히 백인 이외 인종이었던 실존 인물을 백인 배우가 연기하는 경우, 또는 특정 작품을 재해석하며 백인 아닌 캐릭터의 배역에 백인을 기용하는 경우 등이 화이트워싱에 포함된다.

화이트워싱의 역사는 미국 영화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최초로 화이트워싱이 시작된 20세기 초반에는 특수 분장을 한 백인들이 흑인 및 동양인을 연기하는 일이 빈번했다. 다만 당시에는 미국에 백인 이외 배우가 절대적으로 드문 상황이었기에 관객의 반발은 비교적 적었다.

●‘현재진행형’인 화이트워싱

배우들의 인종이 다양해진 이후로는 극중 캐릭터의 인종을 아예 바꿔버리는 사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 중 흑인 배역에 대한 화이트워싱은 크게 줄어들었으나 흑인에 비해 비교적 입김이 약한 동양인, 아메리카 원주민, 아랍인에 대한 ‘표백’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국내에 알려진 여러 작품에서도 이런 관행은 드러난다. 단적인 예로 ‘드래곤볼 에볼루션’(2009)에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동양인 외모의 캐릭터 ‘손오공’ 역할에 백인 배우가 캐스팅됐고, 이집트 제국을 배경으로 한 판타지 영화 ‘갓 오브 이집트’(2016)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은 아랍계열이 아닌 백인 배우들이 연기했다. 다양한 배역을 소화해내는 것으로 유명한 ‘조니 뎁’은 ‘론 레인저’(2013)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역을 맡았다.

●백인 배우는 ‘필수’?

2015년 6월 BBC는 미국의 이런 캐스팅 관행을 진단한 기사에서 백인 배우를 기용해야만 수익을 더 많이 창출할 수 있다고 믿는 일부 영화 제작자들의 믿음이 화이트워싱 성행의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제작자들의 이런 믿음은 ‘그저 미신에 불과하다’는 게 다수 영화 전문가들의 공통된 비판이다. 미국 배우·방송인노동조합(SAG-AFTRA) 대표 데이비드 화이트는 “흑인 배우가 통하지 않는다는 미신은, 그 믿음이 영화계에 끼치고 있는 실질적 폐해를 차치하고 말하면 우습기까지 하다”며 “윌 스미스, 덴젤 워싱턴, 데이비드 오예로워 등 흑인 배우들의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소비되고 있다”고 말했다.

●백인 위주의 제작환경도 문제

미국 영화학 교수 미첼 W. 블록은 많은 영화 스튜디오들이 대부분 백인인 영화 투자자 및 제작자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화이트워싱 관행에 영합하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했다.

2013년에 작성된 미국 UCLA 보고서에 따르면 실제로 미국 영화계에 포진한 경영진급 인사의 94%는 백인인 것으로 드러났다. 리들리 스콧 감독 또한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 연출 당시 이집트인 배역에 백인 배우를 기용한 배경에 대해 “유명한 백인 배우가 없었다면 투자 유치와 영화 제작이 불가능 했을 것”이라고 해명하며 헐리우드의 백인 중심 제작 환경을 언급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개봉예정 작품들에서도 이런 흐름은 여전히 눈에 들어온다.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의 실사 영화에는 주인공 ‘쿠사나기 모토코’ 역할에 스칼렛 요한슨이 캐스팅돼 논란이 일었고, 마블코믹스 원작 ‘닥터스트레인지’에서는 주인공에게 깨달음을 전수하는 티벳 고승 역을 백인 여배우 틸다 스윈튼이 맡으면서 많은 비난을 사고 있다.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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