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두려움 뒤섞인 감독 없는 촬영 현장

만일 영화 촬영 현장에 감독이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장 먼저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요즘처럼 디지털 환경이 발달한 사회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는 감독의 이런 상상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다.

지난해 스마트폰 광고를 위한 단편영화 촬영을 제안받은 이재용 감독은 시나리오를 위한 모든 정보와 자료를 노트북과 모바일 기기 등을 통해 앉은 자리에서 다 해결한다는 사실에 착안, 감독이 현장에 가지 않고 외부에서 원격 조정하는 세계 최초의 영화를 기획한다.

영화는 단편영화의 메이킹 필름 같은 형식을 띤다. 12월의 추운 어느 날 이 감독의 단편영화를 찍기 위해 윤여정, 오정세, 박희순, 강혜정, 이하늬 등 배우 14명이 한자리에 모인다. 그런데 이들은 감독이 한국이 아닌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다. 처음에는 이를 믿지 않았던 배우들이 그들 앞에 놓인 화상 모니터에 이 감독의 모습이 나타나자 그제야 사실로 받아들이고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영화 촬영을 시작한다. 영화는 감독이 없는 촬영 현장에서 좌충우돌하는 배우와 오로지 모니터만으로 현장을 지휘하는 감독의 갈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전개된다. 일종의 영화 촬영 현장에 대한 실험적인 시도인 셈이다. 동시에 촬영장 뒤에서 벌어지는 감독과 배우, 스태프들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비춰 주면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일종의 다큐멘터리 형식이라 밋밋할 것 같지만 갈등과 클라이맥스도 있다. 촬영 현장은 이 감독이 미국이 아닌 한국에 있다는 소문이 떠돌면서 분위기가 급격히 악화된다. 또한 현장과 제대로 연결되지 않아 답답함을 호소하며 대립각을 세우는 감독의 모습도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정사’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 ‘여배우들’ 등으로 섬세한 감각을 뽐냈던 이 감독은 영화 촬영 현장의 숨겨진 이야기를 세세하게 잡아낸다. 영화는 단순한 촬영장 뒷이야기를 넘어 감독의 역할과 현재의 영화 제작 방식에 대한 고찰이 담겼다. 앨프리드 히치콕이나 구로사와 아키라 등 명감독들의 영화에 대한 명언을 중간에 삽입해 영화에 대한 사색을 유도한다.

극영화보다 긴장도나 짜임새가 뛰어난 것은 아니지만 배우 윤여정, 감독 이준익 등이 나누는 가감 없는 입담 등 진솔한 모습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제63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공식 초청됐다. 오는 28일 개봉.

이은주 기자 eri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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