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잠들기 전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고민해 왔던 거대한 질문, ‘나는 누구인가’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심인성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주인공 크리스틴의 혼란은 ‘에반게리온’의 이카리 신지나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Who am I?’라는 물음보다 훨씬 동물적이다. 그녀는 현재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사라져버린 근 10년간의 과거를 기억해 내야만 한다. 이러한 그녀의 상황은 절박한 동시에 공포스럽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자신이 낯선 곳에 낯선 이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이 병의 증상은 어떤 면에서 영화 속 인물보다 관객들에게 더 극한 불안감을 전달한다. 매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크리스틴과 달리 관객들은 단절된 하루하루를 반복적으로 체험하면서 그녀의 인생에 아무런 희망도 없음을 직관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크리스틴에게 ‘기억’은 곧 ‘나’라는 주체를 규정해 주는 근거이다. 내가 살아온 날들이야말로 지금의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증거라는 의미다. 따라서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는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철학적 모티브는 기억과 자기 인식을 연결시켜 신선한 드라마를 만들어 냈던 ‘토탈리콜’(1990)이나 ‘다크시티’(1999)와 같은 SF 영화들과 상통하는 데가 있다. 그러나 크리스틴은 자신이 병들어 있다는 사실조차 매일 다시 인식해야 하는, 훨씬 비관적인 상태의 환자다. ‘내가 잠들기 전에’의 서스펜스는 먼저, 이처럼 한 여성의 기막힌 사연에 놓여 있다.

크리스틴은 끊임없이 타인에게 과거의 자신에 대해 예측하고 질문한다. 가령 “내가 바람을 피웠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라든가 “나, 좋은 엄마였어?”와 같은 대사들은 그녀가 바라는 자신의 모습을 기저에 깔고 있다. 이상적 자아와 실존적 자아의 간극을 확인하면서 느끼는 좌절감 또한 공히 그녀의 몫이다. 극 초반부 카메라는 패닉 상태에 있는 크리스틴의 심리를 집요하게 따라가다가 서서히 주변 인물들에게로 초점을 옮겨간다. 그녀가 매일 만나는 두 명의 남자, 즉 그녀를 돌보고 있는 남편과 남편 몰래 크리스틴을 치료 중인 의사는 그녀가 기억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물들인 한편 이 영화의 두 번째 서스펜스 장치이기도 하다. 크리스틴은 이들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 그들 또한 매일 처음 만나는 타인에 불과하며, 타인의 기억과 말로써 재구성된 나의 과거는 애초에 성글고 불완전한 속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의 결말부에서 크리스틴은 이 모든 악몽이 시작된 곳으로 돌아가 그녀 스스로 모든 것을 회복시켜야 할 상황에 놓인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전형적인 장르 영화의 즐거움에 덧붙여 한 여성이 자아를 찾아가는 위태한 여정에 동일한 무게를 실어 준다. 과연 그녀는 거짓된 증언과 주변인들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신의 과오(過誤)가 빚어낸 이 끔찍한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어두운 서스펜스와 뭉클한 드라마가 적절히 조율된 흥미로운 작품이다. 30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윤성은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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