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가 젊었을 때 부터 유대인 절멸 사상을 발전시켰음을 보여주는 히틀러의 서신이 7일 공개됐다.
히틀러가 30세로 독일군 복무 중이던 1919년에 군 타자기로 작성한 이 문서 말미에는 아돌프 히틀러라는 자필 서명이 누렇게 바랜 100년 가까운 용지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 문서에 히틀러는 “유대인이 우리 민족에게 제기하는 위험은 우리 국민 대다수가 보이는 부정할 수 없는 경멸감에서 나타나며 이는 개인적 접촉과 개개의 유대인들이 남기는 개별적 인상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거의 언제나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이라고 적었다.
히틀러는 이어 강력한 정부는 이른바 “유대인의 위협”을 차단할 수 있으며 그들의 권리를 부정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하고 하지만 “그 궁극적 목적은 유대인들을 모두 단호하게 제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문서는 히틀러가 나치독일군의 선전 작업을 맡고있던 아돌프 겜리히에게 보내 ‘겜리히 서신’으로 불려온 것으로 히틀러가 유대인의 절멸을 촉구한 최초의 작성 기록으로 볼 수 있어 학계에서도 관심을 끌어왔다.
히틀러는 이 문서를 작성할 당시 독일군 내부에서 반 유대 정신 교육 관련 업무에 배속됐다.
그가 겜리히에게 이 문서를 작성해 보낸 것도 당시 상관이었던 울리히 마이르 대위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이 문서는 한 때 떠들썩한 논란을 빚었던 ‘히틀러 일기’가 위작임을 밝혀낸 필적 전문가 찰스 해밀튼이 1988년 히틀러 자신의 서명 기록이라고 감정 평가했다.
로스앤젤레스의 반유대인활동감시단체인 사이먼 비젠탈 센터 설립자로 유대교 목사인 마빈 히어는 이 문서를 15만달러에 구입해 공개했다.
그는 제2차대전에 참전했던 미국인 윌리엄 지글러가 갖고있던 이 문서가 몇몇 중개상을 거쳐 3주 전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고 밝혔다.
지글러는 네쪽 분량의 이 타자 문서를 2차대전 종전을 몇달 남겨두지 않았던 때 독일 뉘른베르크 부근의 한 나치 문서고에서 발견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고있다.
사이먼 비젠탈센터는 이 문서를 부속 톨러런스 박물관에서 오는 7월부터 상설 전시할 계획이다.
연합뉴스
히틀러가 30세로 독일군 복무 중이던 1919년에 군 타자기로 작성한 이 문서 말미에는 아돌프 히틀러라는 자필 서명이 누렇게 바랜 100년 가까운 용지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 문서에 히틀러는 “유대인이 우리 민족에게 제기하는 위험은 우리 국민 대다수가 보이는 부정할 수 없는 경멸감에서 나타나며 이는 개인적 접촉과 개개의 유대인들이 남기는 개별적 인상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거의 언제나 바람직하지 않은 것들”이라고 적었다.
히틀러는 이어 강력한 정부는 이른바 “유대인의 위협”을 차단할 수 있으며 그들의 권리를 부정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하고 하지만 “그 궁극적 목적은 유대인들을 모두 단호하게 제거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문서는 히틀러가 나치독일군의 선전 작업을 맡고있던 아돌프 겜리히에게 보내 ‘겜리히 서신’으로 불려온 것으로 히틀러가 유대인의 절멸을 촉구한 최초의 작성 기록으로 볼 수 있어 학계에서도 관심을 끌어왔다.
히틀러는 이 문서를 작성할 당시 독일군 내부에서 반 유대 정신 교육 관련 업무에 배속됐다.
그가 겜리히에게 이 문서를 작성해 보낸 것도 당시 상관이었던 울리히 마이르 대위의 지시에 따른 것이다.
이 문서는 한 때 떠들썩한 논란을 빚었던 ‘히틀러 일기’가 위작임을 밝혀낸 필적 전문가 찰스 해밀튼이 1988년 히틀러 자신의 서명 기록이라고 감정 평가했다.
로스앤젤레스의 반유대인활동감시단체인 사이먼 비젠탈 센터 설립자로 유대교 목사인 마빈 히어는 이 문서를 15만달러에 구입해 공개했다.
그는 제2차대전에 참전했던 미국인 윌리엄 지글러가 갖고있던 이 문서가 몇몇 중개상을 거쳐 3주 전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고 밝혔다.
지글러는 네쪽 분량의 이 타자 문서를 2차대전 종전을 몇달 남겨두지 않았던 때 독일 뉘른베르크 부근의 한 나치 문서고에서 발견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고있다.
사이먼 비젠탈센터는 이 문서를 부속 톨러런스 박물관에서 오는 7월부터 상설 전시할 계획이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