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순수 자연발효 방식으로 생산 람빅의 참맛
인공 효모 없이 공기 노출 통해 자연스레 제조
인위적 손길 최소화..지구 기후변화 그대로 반영
신맛과 단맛, 곰팡이향 등 예측 불가능하게 섞여
유럽 특산물 유산 지정..과일 람빅 등 현대화도
네덜란드 화가 피터 브뤼겔의 1568년작 ‘농부의 결혼식’. 한 사람이 축하연을 위해 자연 발효 맥주인 람빅을 도자기 용기인 피처에 나눠 담고 있다.
보통의 맥주는 제조 과정에서 회사가 원하는 효모 외에 다른 세균이 들어가지 않게 극도의 노력을 기울인다. 맥주가 발효 중 잡균과 만나면 신맛과 곰팡이향 등이 예상치 못한 형태로 뒤섞여 맛과 향이 변한다. 그런데 람빅은 일반적인 맥주와 정 반대로 만들어진다. 인공 배양 효모를 쓰지 않고 맥즙(맥주 발효를 위해 보리를 끓여 만든 액체)을 공기 중에 노출시켜 온갖 세균이 마음껏 자라게 놔둔다. 아예 실내 수영장처럼 생긴 쿨십(Coolship)이라는 곳에 맥즙을 넣고 식혀 자연 상태로 발효하도록 돕는다. 당연히 라거나 에일의 정제된 맛은 나지 않는다. 듣도 보도 못한 신맛과 상큼함, 균류 특유의 쿰쿰함과 텁텁함이 한데 모여 있다. 보통의 맥주와는 다른 문법과 철학을 갖고 있다. 벼농사에 비유하자면 땅을 갈지도 않고 농약과 비료도 치지 않는 태평농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한 양조사가 실내 수영장 모양의 공간인 쿨십(Coolship)을 청소하고 있다. 쿨십은 람빅 양조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이곳에 맥즙을 넣고 공기에 최대한 노출해 발효시킨다. 지효준
벨기에의 대표적인 람빅 양조장인 ‘드리 폰타이넌’(3 Fonteinen)의 람빅 제품.
다른 맥주들과 마찬가지로 람빅 역시 시대 변화에 대응하고자 노력 중이다. 람빅을 숙성하는 데 쓰는 배럴(참나무통)에서 배어나는 맛과 향을 강조하거나 청사과와 살구 등 과일을 첨가한 제품도 나왔다. 현대 크래프트 비어 발전에 힘입어 보케(Bokke)나 안티두트(Antidoot) 등 람빅 스타일의 자연발효 양조장도 세계로 퍼지고 있다. 다만 한국에서는 지금도 람빅을 접하기가 매우 힘들고 관련 서적도 1권 밖에 없다. 필자는 이 점이 아쉽고 슬프다.
도자기 용기인 피처로 람빅을 서빙하는 모습. 람빅은 상상 이상으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자연발효 맥주다.
필자는 람빅을 어떤 정형화된 주류의 형태에 끼워 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람빅은 분명 맥주이지만 우리가 아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갓 제조한 람빅과 오래 숙성한 람빅을 섞어 한 번 더 발효한 괴즈(gueuze) 등 새로운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람빅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길 강추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맛보지 못했다면 이번이 기회다. 그간 갖고 있던 술에 대한 모든 인식이 송두리째 바뀔 기분 좋은 충격을 느낄 것이다.
국내 유일의 람빅 관련 서적인 강태현 작가의 ‘람빅’
지효준은: 1995년생. 중국 베이징대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맥주의 맛 뒤에 숨겨진 경제와 사회, 문화의 매력을 발견하고 각국을 돌며 ‘세상의 모든 맥주’를 시음·분석·정리하고 있다. ‘글로벌 맥주 플랫폼’을 꿈꾸며 다양한 사업도 준비 중이다. 한국에서 맥주가 ‘폭탄주’ 용도로만 쓰이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크다. 맥주의 진정한 가치를 알리는데 젊음을 건 ‘맥덕’이다.
정리 베이징 류지영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