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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가장 가까운 술 람빅을 아시나요? [지효준의 맥주탐험]

자연과 가장 가까운 술 람빅을 아시나요? [지효준의 맥주탐험]

류지영 기자
류지영 기자
입력 2022-03-08 16:55
업데이트 2022-03-09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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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순수 자연발효 방식으로 생산 람빅의 참맛
인공 효모 없이 공기 노출 통해 자연스레 제조
인위적 손길 최소화..지구 기후변화 그대로 반영
신맛과 단맛, 곰팡이향 등 예측 불가능하게 섞여
유럽 특산물 유산 지정..과일 람빅 등 현대화도

네덜란드 화가 피터 브뤼겔의 1568년작 ‘농부의 결혼식’. 한 사람이 축하연을 위해 자연 발효 맥주인 람빅을 도자기 용기인 피처에 나눠 담고 있다.
네덜란드 화가 피터 브뤼겔의 1568년작 ‘농부의 결혼식’. 한 사람이 축하연을 위해 자연 발효 맥주인 람빅을 도자기 용기인 피처에 나눠 담고 있다.
흔히 맥주라고 하면 다른 주류에 비해 상미기한(식품의 맛이 가장 좋은 기한)·양조기간이 짧고 맛과 향도 단순하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20년 넘게 맛이 유지되고 발효하는 데 길게는 5년이 걸리는 맥주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깊은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기만의 개성도 확실히 보여주는 람빅(Lambic)이다.

보통의 맥주는 제조 과정에서 회사가 원하는 효모 외에 다른 세균이 들어가지 않게 극도의 노력을 기울인다. 맥주가 발효 중 잡균과 만나면 신맛과 곰팡이향 등이 예상치 못한 형태로 뒤섞여 맛과 향이 변한다. 그런데 람빅은 일반적인 맥주와 정 반대로 만들어진다. 인공 배양 효모를 쓰지 않고 맥즙(맥주 발효를 위해 보리를 끓여 만든 액체)을 공기 중에 노출시켜 온갖 세균이 마음껏 자라게 놔둔다. 아예 실내 수영장처럼 생긴 쿨십(Coolship)이라는 곳에 맥즙을 넣고 식혀 자연 상태로 발효하도록 돕는다. 당연히 라거나 에일의 정제된 맛은 나지 않는다. 듣도 보도 못한 신맛과 상큼함, 균류 특유의 쿰쿰함과 텁텁함이 한데 모여 있다. 보통의 맥주와는 다른 문법과 철학을 갖고 있다. 벼농사에 비유하자면 땅을 갈지도 않고 농약과 비료도 치지 않는 태평농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한 양조사가 실내 수영장 모양의 공간인 쿨십(Coolship)을 청소하고 있다. 쿨십은 람빅 양조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이곳에 맥즙을 넣고 공기에 최대한 노출해 발효시킨다. 지효준
한 양조사가 실내 수영장 모양의 공간인 쿨십(Coolship)을 청소하고 있다. 쿨십은 람빅 양조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으로 이곳에 맥즙을 넣고 공기에 최대한 노출해 발효시킨다. 지효준
람빅의 역사는 인류 맥주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고 해도 무방하다. 양조 기술이 없던 선조들이 맨 처음 술을 빚던 원형의 방식이어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를 지배하던 기원전부터 인간 사회에서 뻬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농민화가인 피터 브뤼겔(1525~1569)이 그린 ‘농부의 결혼식’(1568)에도 축제를 위해 돌잔에 람빅을 나눠 담는 장면이 나온다. 람빅은 전통을 인정받아 지금도 브랜드가 보존되고 있다. 람빅이라는 이름은 벨기에산 자연발효 맥주에만 붙일 수 있다. 다른 나라에서 만든 자연발효 맥주에는 ‘와일드 에일’(Wild Ale) 혹은 ‘람빅에서 영감을 얻은 맥주’로 명명된다. 프랑스의 샹파뉴(Champagne) 지역에서 생산한 스파클링 와인만 ‘샴페인’으로 부를 수 있고, 코냐크(Cognac) 지방에서 만든 포도 브랜디(와인 증류주)만 ‘꼬냑’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벨기에의 대표적인 람빅 양조장인 ‘드리 폰타이넌’(3 Fonteinen)의 람빅 제품.
벨기에의 대표적인 람빅 양조장인 ‘드리 폰타이넌’(3 Fonteinen)의 람빅 제품.
오늘날 대부분 맥주는 더 안정적인 맛을 내려고 공기 유입 등을 완벽히 제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생산된다. 그러나 람빅은 지금도 자연발효 양조법을 지킨다. 지구 기후 변화에 맞춰 맛도 서서히 바뀌어왔다. 재즈의 즉흥연주처럼 만드는 시기와 장소에 따라 풍미가 다르다. ‘투박한 술’인 람빅은 한때 명백이 끊길 뻔 한 적도 있었지만 벨기에 람빅 양조장들이 호랄(HORAL·Hoge Raad voor Ambachtelijke Lambiekbieren)이라는 조직을 세워 전통 문화 보전에 앞장서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이들의 노력은 1997년 유럽연합(EU) 전통특산물 인증인 TSG(Traditionally Specialty Guaranteed)를 획득해 결실을 맺었다.

다른 맥주들과 마찬가지로 람빅 역시 시대 변화에 대응하고자 노력 중이다. 람빅을 숙성하는 데 쓰는 배럴(참나무통)에서 배어나는 맛과 향을 강조하거나 청사과와 살구 등 과일을 첨가한 제품도 나왔다. 현대 크래프트 비어 발전에 힘입어 보케(Bokke)나 안티두트(Antidoot) 등 람빅 스타일의 자연발효 양조장도 세계로 퍼지고 있다. 다만 한국에서는 지금도 람빅을 접하기가 매우 힘들고 관련 서적도 1권 밖에 없다. 필자는 이 점이 아쉽고 슬프다.
도자기 용기인 피처로 람빅을 서빙하는 모습. 람빅은 상상 이상으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자연발효 맥주다.
도자기 용기인 피처로 람빅을 서빙하는 모습. 람빅은 상상 이상으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자연발효 맥주다.
맥주업계 종사자들을 인터뷰할 때마다 “맥주를 만드는 주인공은 효모다. 사람은 그저 효모가 맥주를 잘 빚게 도와주는 집사”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사람의 통제를 최소화해 만드는 람빅이야말로 자연에 가장 가까운 맥주”라고 강조했다. 그래서인지 람빅은 어느 술보다 친숙하면서도 자기만의 색깔이 강하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지만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가는 신선함도 갖고 있다.

필자는 람빅을 어떤 정형화된 주류의 형태에 끼워 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람빅은 분명 맥주이지만 우리가 아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갓 제조한 람빅과 오래 숙성한 람빅을 섞어 한 번 더 발효한 괴즈(gueuze) 등 새로운 시도도 이어지고 있다. 람빅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길 강추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맛보지 못했다면 이번이 기회다. 그간 갖고 있던 술에 대한 모든 인식이 송두리째 바뀔 기분 좋은 충격을 느낄 것이다.
국내 유일의 람빅 관련 서적인 강태현 작가의 ‘람빅’
국내 유일의 람빅 관련 서적인 강태현 작가의 ‘람빅’
지효준은: 1995년생. 중국 베이징대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맥주의 맛 뒤에 숨겨진 경제와 사회, 문화의 매력을 발견하고 각국을 돌며 ‘세상의 모든 맥주’를 시음·분석·정리하고 있다. ‘글로벌 맥주 플랫폼’을 꿈꾸며 다양한 사업도 준비 중이다. 한국에서 맥주가 ‘폭탄주’ 용도로만 쓰이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크다. 맥주의 진정한 가치를 알리는데 젊음을 건 ‘맥덕’이다.
지효준은: 1995년생. 중국 베이징대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맥주의 맛 뒤에 숨겨진 경제와 사회, 문화의 매력을 발견하고 각국을 돌며 ‘세상의 모든 맥주’를 시음·분석·정리하고 있다. ‘글로벌 맥주 플랫폼’을 꿈꾸며 다양한 사업도 준비 중이다. 한국에서 맥주가 ‘폭탄주’ 용도로만 쓰이는 것 같아 안타까움이 크다. 맥주의 진정한 가치를 알리는데 젊음을 건 ‘맥덕’이다.


정리 베이징 류지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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