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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공초문학상] “시는 그 시대를 뛰어넘어야 영속성 가질 수 있죠”

[제19회 공초문학상] “시는 그 시대를 뛰어넘어야 영속성 가질 수 있죠”

입력 2011-06-01 00:00
업데이트 2011-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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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자 정호승 시인 인터뷰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에 버리고 온 나를 찾아가지 못한다

의상대 붉은 기둥에 기대 울다가

비틀비틀 푸른 수평선 위로 걸어가던 나를

슬그머니 담배꽁초처럼 버리고 온 뒤

아직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

이제는 봄이 와도 내 손에 풀들이 자라지 않아

머리에 새들도 집을 짓지 않아

그 누구에게도 온전한 기쁨을 드리지 못하고

나를 기다리는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을 이미 잊은 지 오래

동해에서는 물고기들끼리 서로 부딪치지 않고

별들도 떼지어 움직이면서 서로 부딪치지 않는데

나는 나를 만나기만 하면 서로 부딪쳐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

낙산사 종소리도 듣지 못한다




1970~80년대였다. 분노의 언어는 분명히 적의 심장에 날아가 꽂혔건만 가슴이 아리고 피 흘린 쪽은 외려 자신이었다. 엄정한 과학의 언어는 체계적이었지만 이념의 틀 안에서 쉬 헤어나지 못한 채 바싹바싹 메말라 갔다. 공중에 한 뼘쯤 떠 있는 듯한 관념의 언어 또한 사람들의 마음에 정박하지 못한 채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 시절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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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0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만난 정호승 시인은 “시를 쓰는 과정은 고통과 기쁨이 엇갈리는 시간”이라면서 “인간을 탐구하며 구현해낸 공초 선생의 시 정신에 어떻게 닿을 수 있는지 찾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지난 30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만난 정호승 시인은 “시를 쓰는 과정은 고통과 기쁨이 엇갈리는 시간”이라면서 “인간을 탐구하며 구현해낸 공초 선생의 시 정신에 어떻게 닿을 수 있는지 찾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그때 정호승(61) 시인의 시(詩) 속 언어들은 더욱 빛났다. 갈갈이 찢긴 시대의 조각들을 하나씩 주워 담았고 조심스레 이어 붙였다. 다치고 서러운 마음을 가만히 쓸어 주고 위로해 줬다. 투쟁을 들먹이지 않으며 투쟁을 버팅기게 했고, 사랑을 말하면서 사랑 너머를 꿈꾸게 했다. 모든 가치의 밑바닥에는 사랑이 있다고,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고, 잘 더듬어 찾아보자고 노래했다. ‘서울의 예수’,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사랑하다가 죽어 버려라’ 등 내놓는 시집마다 모두 그랬다. 시대의 아픔을 똑바로 쳐다보면서도 이율적으로 사랑을 얘기한 ‘사랑의 시인’이었다. 그러나 지난 30일 만난 시인은 정색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제 이미지가 너무 고정됐나 봐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사랑의 시인’이라며 남녀상열지사나 얘기하는 시인처럼 바라보더라고요. 저, 젊은 시절에 너무 가난해서 데이트 한 번 변변히 못한 사람이에요.”

그렇다. 그는, 그의 시는 많이 변했다. 1972년 등단했으니 벌써 40년 차 시인이다. 변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할 수 있는 세월이다.

그는 “시대가 변하고 삶이 변하는데 그 변화의 마디마디가 없을 수 없다.”면서 “시대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시인의 역할이라고 판단했지만 지금은 내 눈물 닦기도 버겁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내 시를 읽고 공감과 위로를 받고 스스로 눈물을 닦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덧붙였다.

“한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는 시는 생명력이 짧을 수밖에 없는 만큼 그 시대를 뛰어넘어야 영속성을 가질 수 있죠. 시대는 지나가지만 시는 영원하잖아요.”

정호승 시인이 제19회 공초문학상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점점 선명해진다. 수상작은 지난해 말 내놓은 열 번째 시집 ‘밥값’(창비 펴냄)에 들어 있는 ‘나는 아직 낙산사에 가지 못한다’이다. 시가 품은 성찰과 자성, 관조가 두드러지고 시어는 더욱 넉넉해졌다. 그리고 수상작 속에서 ‘아직 나를 용서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한다’라고 표현했듯 스스로 더욱 엄격해졌다. 얼핏 이질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공초 오상순’과 ‘정호승’의 접점이 널찍해지는 지점이다.

그는 “1968년 대학(경희대 국문과)에 입학하며 대구에서 서울로 처음 올라왔을 때 공초 선생은 이미 돌아가신 뒤라 뵌 적이 없었다.”면서도 “그 이름으로 남긴 문학상을 받게 된다니 오랜 시간 시를 버리지도, 시로부터 버림받지도 않았음을 감사할 따름”이라고 기쁨을 표현했다.

‘나는 아직’ 외에도 시집 ‘밥값’에 깔린 전체적인 심상은 죽음, 특히 스스로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죽음에 주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삶에 대한 집착, 욕망에 대한 거리두기를 꾀하는 초월의 지향도 함께 밝힌다.

“죽음도 인간의 본질임을 인식하며 더욱 천착하게 되네요. 나이 탓인가…. 삶의 본질로서 사랑과 죽음이 품고 있는 무게감이 똑같지 않으냐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사랑의 또 다른 형태겠죠. 더욱 성찰하고 시대의 진실에 다가갈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어요.”

역시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사랑의 시인’이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정호승 시인은…

▲1950년 경남 하동 출생 ▲경희대 국문과, 동 대학원 졸업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 당선,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 당선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등 10권의 시집과 ‘항아리’, ‘연인’ 등 동화집, ‘정호승의 위안’ 등 산문집 출간 ▲소월시문학상, 동서문학상, 정지용문학상, 편운문학상, 가톨릭문학상, 상화시인상, 지리산문학상 등 수상
2011-06-01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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