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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급 신라 무덤의 출현… 풀어야할 숙제 많아

왕릉급 신라 무덤의 출현… 풀어야할 숙제 많아

입력 2013-04-03 00:00
업데이트 2013-04-03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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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방식 두고 논란일 듯..”축조시기 가늠 힘들어”

통일신라시대 왕릉급 무덤이 출현했다는 말을 듣고 봄기운 완연한 2일 직접 찾은 발굴현장은 농촌의 야산에 있었다.

신라시대 중요한 생산시설이 밀집한 황성동 유적 근처에서 자동차로 20분 정도를 달려 도착한 경주시 천북면 신당리 산7번지 일대는 발굴 막바지 작업이 한창이었다. 그 인근 논밭 사이로는 군데군데 지붕을 파란색 페인트로 칠한 공장, 혹은 창고인 듯한 시설이 있었다.

발굴단 설명에 의하면 이곳 발굴현장은 어떤 개인이 강판을 비롯한 자동차 부품 제조업과 관련한 공장부지를 조성하기로 한 곳이었다. 그에 앞서 계림문화재연구원에 문화재 지표조사를 한 결과 유적이 분포하는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이번에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이곳은 지난 29일 전문가 검토회의를 통해 발굴성과를 점검하고, 문화재청에서도 이 정도 유적이라면 현장을 보존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결정한 터라 발굴조사는 사실상 중단된 상태였다. 조사단인 계림문화재연구원은 발굴 현장의 측량과 기록에 주력하는 중이었다.

무덤은 평야지대로 흘러내린 야산 능선이 끝나는 지점에 있다. 이 능선 끝 지점을 일정한 구간을 자르다시피 해서 비교적 편평한 대지를 마련하고 무덤을 만든 것으로 드러났다.

한창 발굴을 실시하던 중간에 조사를 중단한 까닭에 아쉽게도 봉분 중앙에 겨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무덤 주인공의 매장시설인 매장주체부는 아직 조사를 못했다.

화창한 봄기운 아래 모습을 드러낸 고분은 한눈에도 범상치 않은 인물이 묻힌 곳임을 직감케 했다. 규모가 그리 크다고 할 수는 없지만 원형인 봉분은 그 테두리를 장방형으로 곱게 다듬은 장대석으로 차곡차곡 쌓아올렸다.

조사단에 따르면 이런 호석(護石)은 받침돌에 해당하는 지대석을 놓고 그 위로 3단을 쌓아올렸다. 계곡 쪽 봉분 상당 부분이 유실되기는 했지만 비교적 온전하게 남은 지점 조사 상황을 보니 대단한 정성을 기울여 조성한 무덤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더구나 호석 바깥으로는 일정한 구간마다 비스듬히 기대어 세운 받침돌이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노출돼 있었다.

매장 주체시설은 봉분 정중앙 지점에서 발견됐다. 내부 조사가 이뤄지지 못한 채 중단된 까닭에 조사단에서도 아쉬움이 컸다. 다만 거기에서 함몰된 구덩이가 발견되고, 석실 천장을 덮었을 덮개돌도 사라진 정황 등으로 볼 때 이미 이 무덤은 극심한 도굴 피해를 보았음에 틀림없다고 조사단은 말했다.

평야지대를 내려다보는 봉분 전면 남쪽에는 약간 동쪽으로 치우친 지점에서 장방형 돌무더기 시설이 확인됐다. 이는 왕릉을 비롯해 통일신라시대 최고 지배층 무덤에서는 흔히 보이는 상석(床石)이라는 돌상 모양 시설물이 있던 흔적이다.

이런 상석은 조선왕릉에서도 ‘혼유석(魂遊石)’이라는 이름으로 보이는 시설물이다. 상석은 그 위를 장식했을 편평한 돌판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신라 무덤에서는 이런 상석이 거의 예외 없이 봉분 남쪽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지점에서 발견된다. 그 이유는 정남쪽에는 무덤방으로 향하는 길을 별도로 마련하기 때문이다.

봉분 뒤편 야산 쪽으로는 수직으로 쌓아올린 돌 축대가 완연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 축대는 봉분을 뒤에서 감싸듯 활 모양으로 굽어진 호형(弧形)이었다.

이 축대 안쪽을 따라서는 폭 90㎝가량인 배수로 시설도 드러났다. 배수로는 길게 이어져 축대와 봉분을 감싸다가 이 고분 서쪽 지점에 인접한 또 하나의 거대한 봉토분으로 이어지는 모습이었다.

또 하나의 봉토분은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사업대상지 경계 지점에 위치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사업 대상지에 포함된 봉분 구역에서는 트렌치(시굴 조사 구덩이) 하나를 가볍게 넣은 흔적이 있었다. 그 트렌치 사이로 돌이 노출됐다. 그리고 그 봉분 중앙 정상부에는 거대한 함몰 구덩이가 있었다. 아마 도굴한 흔적일 것이다.

조사단은 이번에 조사한 봉토분과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봉토분은 모종의 세트를 형성할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았다. 아마도 부부라든가 아버지와 아들 정도의 관계에 해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사단에서 고민은 이 무덤의 성격이 과연 무엇이며, 언제쯤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무덤은 위치라든가 무덤 구조 등에서 민애왕릉으로 전하는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왕릉급 무덤과 대단히 흡사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전(傳) 민애왕릉이 과연 신라 왕릉이라면, 이 고분 또한 왕릉임에 틀림없다.

다만 전 민애왕릉을 왕릉이라고 최종 단정하지 못하듯 이번 신당리 봉토분 또한 왕릉급 혹은 그에 준하는 최고 지배계층이 묻힌 곳 정도로 파악된다. 축조시기는 석실 내부 조사가 이뤄지지 않고, 이렇다 할 만한 유물을 발견하지 못했으므로 가늠이 힘들다.

조사단에서는 “8세기 중반 무렵이 아닐까 생각해보지만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부 고고학자는 “9세기 무렵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를 제시하기도 한다.

이 신당리 고분이 봉착한 또 하나의 숙제는 유적 처리 문제다. 문화재청에서는 이미 현장 보존을 결정했다. 하지만 어떻게 보존하느냐 하는 문제는 또 다른 고민거리다.

무덤 구조나 성격으로 보아 국가 사적 지정이 마땅하지만 경주시에서는 난색을 표시한다. 사적 지정에 따른 인근 토지 이용에 제한이 따를 수밖에 없고, 이렇게 되면 인근 주민들이 반대하고 나설 것이라는 이유를 댄다.

또한 이번 조사대상지가 사유지인 까닭에 설혹 사적 지정이나 지방문화재로 지정해도 해당 토지를 매입해야 하는 문제 등이 있다. 이래저래 이 고분은 발견 이후 오히려 풀어야 할 숙제를 더 많이 던져주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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