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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15>

김주영 대하소설 ‘객주’ 완결편 <15>

입력 2013-04-19 00:00
업데이트 2013-04-19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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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주영 그림 최석운

그는 줄곧 옷깃을 여미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말래 도방 거리에 당도해 보았자, 호들갑스럽게 맞이해줄 호박 갈보가 있다거나 갈롱을 떨며 육허기를 채워줄 동자치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뜨끈뜨끈하게 군불을 지핀 구들장에 허리를 굽고 한잠 늘어지게 자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더라고, 10냥짜리 소금 두 섬을 덧거리로 얻게 된 것도 걸음을 빨리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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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향도하는 행중 식구들은 흉·풍년에 따라서 들쭉날쭉하였지만 대개 4, 50여 명을 헤아렸다. 그 동사하는 식구들을 탈없이 영솔하기 위해선 어떤 경난에도 자신을 지체없이 던지는 희생이 필요했다. 소년 시절부터 행상들에게 익히 보아온 범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장시에서 억매흥정으로 뜸베질하는 떠돌이 행상을 부상의 이름으로 엄중하게 징치하고, 신표 없이 부상 행세를 하며 눈먼 돈을 노리는 자들을 찾아내 장시에서 내쫓는 일도 모두 그가 앞장서서 해온 일이었다. 그랬기에 언문밖에 모르는 그가 내성 행상에서 도감의 직책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날씨는 차가워 콧날이 시큰거릴 정도였으나 저녁거미가 내려올 무렵 그는 장대 끝에 내걸린 용수들이 바람에 시달리는 말래 숫막거리에 당도하였다. 거느린 식솔도 없고 정처도 없는 부상들이 묵을 처소라면 조선 팔도 어디서나 숫막뿐이었다. 이토록 스산하게 해질 무렵에는 필경 객회가 쓸쓸하기로, 가랑이 벌리고 앉아 지분이나 다스리는 동자치라도 있다면 먼발치에서 힐끗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심란함을 달랠 수 있으련만, 도방 봉노에는 고린내 등천하는 사내들만 우글거리고 있었다. 마침 문틈으로 조용조용 읊조리는 배고령(裵高靈)의 신세타령이 가만가만 새어나왔다.

주인 주인 나오소 좌사 손님 들어가오

서해안에 사는 사람 서로서로 형제인데

고을 백민끼리 남남 보듯 할 수 있소

산토끼가 죽어가면 여우도 슬퍼하네

금수도 그러한데 한심하다 우리 세상

무거운 등짐 지고 이곳저곳 떠돌면서

아침에는 동녘 하늘 저녁에는 서녘 땅

어쩌다 병이 나면 구완할 이 전혀 없네

사람에게 짓밟히고 텃세한테 괄시 받고

언제나 숨겨두면 까마귀의 밥이 되고

슬프다 우리 인생 이럴 수가 어찌 있소

우리네 산다 한들 몇만 년을 살 것이오

한데 묶어 단결하고 기율로써 다스리면

형도 좋고 아우 좋고 서로서로 도울제면

동네방네 좋을시고 우리 고을 좋을시고……

문 닫은 봉노에서 살담배들을 어찌나 피워댔는지 매캐한 연기가 샛재 잔허리에 아침 안개 끼듯 하였다. 봉노 한쪽에는 저녁거미 내리는 것을 보고 켜둔 산초 기름등잔이 타고 있었으나 담배 연기 때문에 사람들 얼굴도 분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행수가 들어서자, 호박고누를 두고 있던 축들이나 술푼주를 가운데 놓고 추렴을 하던 동배간들이 뜨끈뜨끈한 아랫목에 두었던 술푼주와 섞박지 그릇을 치우고 윗목으로 썩 비켜 앉았다. 어슥버슥 누웠던 동무들도 벌떡 상반신을 일으키고 앉았다. 봉노 안에는 쉰내와 고린내가 등천하여 코를 들이댈 수 없을 정도였으나 그것을 가지고 고약하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무 하나가 벌떡 일어나 시렁에서 목침을 내려 행수에게 건넸다. 내왕 길목에 있는 숫막에는 행수만 차지하는 목침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제법 결기가 있다는 길손도 얼떨결에 행수의 목침을 범접했다간 귀싸대기를 얻어맞는 봉변을 당할 수 있었다.

“포주인은 만나보았습니까?”

“몇십 년째 염막에 틀어박혀 울 밖 출입도 않는 사람이 어딜 가겠나.”

“흥정은 아퀴를 지었습니까?”

“소문이 자자한 자린고비가 값을 눅게 잡아줄 리가 없지… 대신 소금 두 섬을 덧거리로 얻었네.”

“그만하면 되었습니다.”

“임자들 요기는 하였나?”

“장떡에 술국으로 얼요기를 하였습니다.”

“만기는 어디 갔나?”

“아침 선반머리에 곁꾼 둘을 데리고 샛재로 되짚어 갔습니다. 얼추 올 때가 되었는데요……”

“그 숫막에 눕혀 두어도 월천댁이 아금받게 구완을 해줄 텐데?”

“만기가 의원이 가까운 말래로 업어 와야 하겠다고 아득바득 우기는 통에 만류할 수 없었습니다. 구억터 소동에서 나귀조차 놓아버리는 실수에 미련하게 굴었던 것이 제깐엔 부담이 되었던가 봅니다.”

“국에 덴 놈 물 보고 분다더니… 그럴 테지…”

“위인이 뉘집 행랑것이나 장물림 같아 보였지만, 얼추 기신을 차리고 나면 그만한 허우대도 찾기 어려워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인즉슨 언중유골이었으나 행수는 귀여겨듣지 않고 슬쩍 넘겼다.

“경황중이라 난 간색도 해보지 못했다네.”

2013-04-19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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