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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지배하는 원동력은 경제·기술력·지리

세상을 지배하는 원동력은 경제·기술력·지리

입력 2013-06-01 00:00
업데이트 2013-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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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이언 모리스 지음 글항아리 펴냄

1848년 4월 런던. 한 여인이 20분째 진창 같은 부두에 무릎을 꿇고 있다. 비까지 내려 드레스가 젖어들자 여인의 몸은 부들부들 떨린다. 추위가 아니라 치욕에 떤 그녀는 빅토리아 영국 여왕. 여왕이 기다린 것은 중국의 장갑기선 기영호였다. 기영호를 타고 영국의 심장부에 들이닥친 중국 총독은 영국을 중국의 속국으로 삼겠다는 청나라 8대 황제 도광제의 포고문을 감정 없이 읽어 내려갔다. 여왕은 끝내 혼절했다. 이후 일생을 버킹엄궁전에 갇힌 그녀는 1901년 중국 제국 이전 시대의 마지막 유물로 사라졌다.

1842년 양쯔강에서 벌어진 아편전쟁에서 영국 군함 네메시스호(오른쪽)가 중국 청나라의 정크선들을 격파하고 있다. 네메시스호는 세계 최초의 철갑 전함이다. 영국국립해양박물관 소장작·글항아리 제공
1842년 양쯔강에서 벌어진 아편전쟁에서 영국 군함 네메시스호(오른쪽)가 중국 청나라의 정크선들을 격파하고 있다. 네메시스호는 세계 최초의 철갑 전함이다.
영국국립해양박물관 소장작·글항아리 제공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이언 모리스 지음, 최파일 옮김, 글항아리 펴냄)는 이런 발칙한(?) 상상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는 반대로 흘렀다. 아편전쟁(1840~1842) 당시 중국은 양쯔강 입구로 포를 쏘며 쳐들어온 영국 함대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언 모리스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교수가 이토록 황당하게 역사를 뒤집은 이유는 뭘까.

1008쪽에 걸쳐 왜 서양이 세상을 지배했는지 설파하는 저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결국 미래다. “사람들이 왜 서양이 지배하는지에 관심이 있는 이유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라는 그의 말처럼, 궁극적으로는 이 물음은 ‘22세기는 동양의 시대가 된다’는 그의 예견을 뒷받침하는 배경이 된다. 빅토리아 여왕에게 굴욕을 안긴 픽션은 과거 동서양의 주도권 경쟁과 앞으로의 운명을 파고드는 대장정에 나서기 전 독자의 시선을 잡아채기 위한 극적 장치인 셈이다.

그간 서구 학자들은 서양의 우세 배경에 대해 방대한 이론을 쏟아냈다. 하나는 예로부터 동서양 사이에 변경 불가능한 결정적인 요인이 존재해 산업혁명이 서양에서 일어났다는 장기고착 이론. 또 하나는 우연한 사건으로 서양이 패권을 잡게 됐다는 단기우연 이론이다.

하지만 둘 다 서양 지배론의 원인을 캐기엔 역부족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동양은 550년부터 1775년까지 1000년 이상 서양을 앞질렀다는 점, 산업혁명은 무역·금융으로 축적된 서유럽의 경제력과 과학혁명이 낳은 기술력, 이민족 침입 우려가 없는 지리적 이점 등이 맞물리며 잉태된,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기원전 1만 4000년부터 서기 2000년까지 지난 1만 6000년의 동서양 역사 속에서 드러난 흥망성쇠를, 직접 고안해낸 분석틀 ‘사회발전지수’로 해부한다. 전쟁 수행 능력, 정보 기술, 조직화·도시성, 에너지 획득이 주요 가늠자로 쓰였다.

‘서양의 지배/1773~2103/여기에 편히 잠들다.’ 이 충격적인 문구는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구두쇠 스크루지가 미래에서 목격한 그의 묘비명을 본뜬 것. 동양과 서양의 사회 발전이 20세기와 같은 속도로 계속되면 동양이 늦어도 2103년엔 서양을 앞설 것이라는 저자의 전망을 압축한 한 줄이다.

그러나 자신의 묘비명을 보여준 미래의 크리스마스 유령에게 “제발, 이 묘비명을 지울 수 있다고 말해주시오!”라던 스크루지의 절박한 애원처럼, 주인공 자리를 뺏기는 서구의 불안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급증하는 중국의 군비 지출 등을 들며 피와 살이 튀었던 과거 서양의 지배기보다 동양의 부상이 유혈 사태를 더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나 책 전체에 스민 서구 중심주의 시각에서 ‘물러나야 하는 자의 미련’이 엿보인다. 4만 2000원.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2013-06-01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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