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을 품은 칼 민심을 품다

붓을 품은 칼 민심을 품다

입력 2014-11-22 00:00
업데이트 2014-11-22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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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기반 약했던 고려 무신정권, 문신과 공생 무신들 득세속에서도 최우 집권때 문신 79% 정권 몰락 바탕엔 모순된 이중통치 구조 존재

무신과 문신/에드워드 슐츠 지음/김범 옮김/글항아리/372쪽/1만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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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신정권에 대한 곱지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최씨 무신집권기의 업적으로 인식되는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해인사 소장)
고려 무신정권에 대한 곱지않은 시선에도 불구하고 최씨 무신집권기의 업적으로 인식되는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해인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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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충헌과 아들 최우를 위해 만들었다는 호신용 불경(佛經·아래)과 불경을 담는 경합(위·보물 제691호·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글항아리 제공
고려시대 무신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충헌과 아들 최우를 위해 만들었다는 호신용 불경(佛經·아래)과 불경을 담는 경합(위·보물 제691호·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글항아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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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918년 왕건이 세워 34대 공양왕까지 475년간 존속했던 고려. 한때 ‘세계에서 가장 성숙한 나라’였다는 평가가 있을 만큼 문물이 번성했지만 후대 사가들은 그 역사를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긴다. 특히 500년 가까운 고려 역사 중 100년을 차지하는 무신정권은 악평 일색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역사는 승자의 편’이라는 말의 한 증거랄까. 조선왕조의 성립과 위상을 합리화하기 위한 유교 사가들이 일관되게 폄훼한 탓이 클 것이다. 그리고 고려 무신정권에 매겨진 그 ‘변칙과 예외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고려시대 무신정권은 일반과 보편 학계의 인식처럼 그렇게 변칙적인 기형의 시대였을까. 신간 ‘무신과 문신’은 사뭇 다르게 그 역사를 써내 눈길을 끈다. 종전의 ‘문신들을 짓밟고 들어선 무신 일색의 강압정치가 판친 암흑기’ 이미지를 확 바꿨다. 대신 ‘문신과 무신이 공생의 고리를 갖고 일궈낸 긍정적 실험정치’가 부각된다.

고려의 무신정권이라면 1170년 무인인 상장군 정중부와 그 휘하의 이의방·이고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의종을 폐위시킨 이른바 ‘무신의 난’부터 몽골에 굴복한 1270년까지를 말한다. 잘 알려졌듯 고려 초부터 문신에 억눌리고 조롱받은 무신들이 ‘문관우대’의 우문정치에 맞서 칼바람을 일으킨 ‘무신의 난’ 이후 고려는 정중부 - 이의방 - 경대승 - 이의민으로 이어지는 ‘죽고 죽이기’의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 혼란을 정리한 게 최충헌이다. 책은 100년 무신정치 중에서도 최충헌부터 시작해 그 아들인 최우와 손자 최항-증손 최의로 이어지는 최씨 집정을 낱낱이 해부했다. 미국 하와이대 한국학연구소장을 지낸 한국학 연구가, 특히 중세고려 전문가답게 역사의 갈피를 파고든 내공이 외국인답지 않게 탄탄하다.

내로라하는 무신 가문 태생인 최충헌은 본디 보수적 인물이었다는 게 중평이다. 그런 그가 탐욕에 눈먼 무신들의 활극을 곱게 봤을 리 없다. 실제로 그가 집권 직후 명종에게 지어 올렸다는 ‘봉사십조’는 나라를 몰락으로 끌고 간 무능한 정책 비판과 반란 폐단의 집약이다. 최충헌은 봉사십조를 통해 폐정의 시정과 왕의 반성을 촉구한 뒤 통치의 핵심기구였던 중방 지도자의 절반 이상을 숙청했다. 책은 그 과정에서 보인 문무 공생과 공조를 통해 얻어낸 백성의 지지에 온정어린 시선을 던진다. 보수적 성향의 최충헌은 권력강화의 방식으로 새 행정조직을 만들지 않았다. 전통적인 질서를 우선시해 문신의 주도권을 그대로 이어갔다. 당시 권력기반이 약했던 최충헌으로선 자신의 집권 합리화에 왕조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그 바탕인 문신과의 공생을 택했던 것이다.

실제로 책에 적시된 통계를 보면 최충헌 집권 후 많은 무신들의 득세에도 불구하고 문신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아들 최우의 집권기간 중 문신의 비율은 79%가 넘는다. 최충헌으로부터 시작된 문무 공조 기조는 최우의 ‘서방’에서 최고조를 이룬다. 문신들로 구성된 기구인 서방은 유학자들에게 군사전략까지 짜게 했다고 한다. 학문적 관심과 유교 이념을 지속시켜 유학자와 백성의 지지를 성공적으로 얻을 수 있었다는 게 저자의 지론이다.

문신과 그들의 전통을 공개적으로 수용했던 최충헌과 아들 최우에 비해 최항·최의는 통솔력에서 뒤졌던 것으로 보인다. 최항은 최충헌 이후 최씨 정권을 지탱해왔던 무신·문신의 합의에 실패했고 최항의 서자였던 최의는 유학자들을 배척했다. 결국 고려왕조는 유학자와 신흥 무신들이 결합한 정변으로 끝이 난 최씨정권의 몰락 얼마 후인 1270년 막을 내렸다.

무신정권 몰락의 가장 큰 원인은 단연 몽골의 잇단 침략이다. 그러나 그 바탕에 최충헌과 최씨 일가가 선택한 이중구조의 모순된 통치기구가 있다고 저자는 짚어냈다. 자신들의 집권을 합리화하기 위해 중앙왕권을 중심으로 한 문신들과의 공생으로 경제·사회·문화의 번성과 백성 지지를 이끌어냈으면서도 집정을 유지할 이념토대를 갖추지 못해 허물어졌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고려에 문반적 유산이 지속될 수 있는 확고한 토대가 성립된 건 최씨정권이 문신의 협조에 크게 의존한 무신 집권기였다.무조건적인 배척이나 비판이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2014-11-22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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