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와 괴짜들의 일본 과학사/고토 히데키 지음/허태성 옮김/부키/432쪽/1만 8000원
해마다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는 이때쯤이면 한국인들은 자괴와 열등감에 빠진다. 특히 이웃 일본과의 비교에서 느끼는 격차는 따라잡지 못할 수준의 괴리감으로 다가온다. 올해도 일본은 오스미 요시노리 도쿄공업대 명예교수의 생리의학상 쾌거를 즐기고 있다. 과학 부문에서만 22번째 수상이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걸까.
일본의 과학 저술가가 쓴 이 책은 그 차이의 배경과 함께 우리가 노력할 점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1854년 개국(開國) 이후 약 160년간 일본의 근현대 과학을 노벨상 수상을 중심으로 정리한 흐름이 독특하다. 조선보다 20년 앞서 문호를 개방해 필사적으로 ‘서양 따라잡기’에 나섰고, 침략 전쟁이 과학 발전과 직결됐다는 주장이 눈에 띈다.
일본이 노벨상을 처음 받은 건 메이지유신 이후 만 81년이 되는 1949년의 일이었다. 그 쾌거에는 우리보다 훨씬 빠르게 서양의 과학지식을 적극 흡수했던 노력이 도사리고 있다. 일본은 이미 1860년대부터 서양 각국에 유학생을 파견했다고 한다. 1871년 파견한 이와쿠라 견구사절단에는 40명의 뛰어난 유학생이 들어 있었고 이들은 귀국 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1900년 무렵 화학자 다카미네 조키치가 아드레날린을 발견하고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가 1회 노벨상 수상자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 등 20세기 초반부터 서양과 경쟁할 수준에 서 있었다고 한다. 1917년에 이화학연구소 설립 이후에는 물리학 분야도 급격한 발전을 이뤄 1950년 무렵 세계를 선도할 만큼 성장했다.
책의 특징은 물리학, 화학, 생리 의학, 원자력 공학 등 각 분야를 개척한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연구 업적과 뒷이야기를 알기 쉽게 풀어낸 점이다. 그 과정에서 메이지 유신, 러일전쟁, 태평양전쟁, 패전과 전후, 그리고 최근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의 사회상이 펼쳐진다.
“동양에 없는 것은 두 가지다. 유형으로는 수리학, 무형으로는 독립심이다.” 이렇게 간파했던 개화기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기틀을 닦아 놓은 자연과학은 일본의 전쟁에 무기를 공급하는 데 쓰이면서 힘을 키워 갔다. 왁스를 섞어 폭발력을 크게 높인 이른바 ‘시모세 화약’은 러일전쟁 때 큰 공을 세운 것으로 기록된다. 중국 하얼빈에 설치된 731부대와 관련해선 일본 전역에서 모집한 연구자 1000여명이 세균전과 인체실험에 투입됐다고 전한다.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바로 과학자의 의식이며 과학 발전과 관련한 사회 시스템의 가동이다. 과학자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기초 연구의 산실을 일궈 낸 것을 비롯해 수직적인 상하관계를 없앤 사례, 끈끈한 사제 관계, 각자가 잘하는 일의 집중 같은 이야기들이 흥미롭다. “일본인의 폐단은 성공을 너무 서둘러 금방 응용 쪽을 개척해 결과를 얻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화학 연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순수 이화학의 연구 기초를 다져야 합니다.” 이렇게 외쳤던 응용 화학자 다카미네 조키치가 1917년 설립한 이화학연구소(리켄)는 이후 100여년 동안 일본의 기초과학 발전을 이끌었다. 강의에 나오는 방정식조차 이해하지 못할 만큼 수학이 약했지만 실험에선 탁월했던 고시바 마사토시가 2002년 노벨상을 받게 된 과정도 눈에 띈다.
일본 과학의 발전사에선 배울 점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개척이며 잇따른 전쟁이 자연과학 발전에 상승효과를 냈다는 사실은 조금 불편하게 다가온다. 그 불편한 진실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저자는 후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일본인이 서양의 사상과 철학, 도덕, 종교를 깊이 이해하는 것은 물리학에 비해 지극히 어려웠다. 일본인이 이제부터 배워야 할 서양의 지혜는 사회의 민주제도라든가 개인의 독립, 자존 등 무형 문화라고 생각한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오스미 요시노리 일본 도쿄공업대 명예교수가 축하 전화를 받고 있다.
서울신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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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러일전쟁 당시 중국 뤼순을 공격했던 일본군이 대포 시험발사를 위해 거리 조준을 하고 있는 모습. 일본이 문호 개방 후 필사적으로 ‘서양 따라잡기’에 나서 기틀을 다진 자연과학은 전쟁에 무기를 공급하면서 성장해 나갔다.
서울신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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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과학 저술가가 쓴 이 책은 그 차이의 배경과 함께 우리가 노력할 점을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1854년 개국(開國) 이후 약 160년간 일본의 근현대 과학을 노벨상 수상을 중심으로 정리한 흐름이 독특하다. 조선보다 20년 앞서 문호를 개방해 필사적으로 ‘서양 따라잡기’에 나섰고, 침략 전쟁이 과학 발전과 직결됐다는 주장이 눈에 띈다.
일본이 노벨상을 처음 받은 건 메이지유신 이후 만 81년이 되는 1949년의 일이었다. 그 쾌거에는 우리보다 훨씬 빠르게 서양의 과학지식을 적극 흡수했던 노력이 도사리고 있다. 일본은 이미 1860년대부터 서양 각국에 유학생을 파견했다고 한다. 1871년 파견한 이와쿠라 견구사절단에는 40명의 뛰어난 유학생이 들어 있었고 이들은 귀국 후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1900년 무렵 화학자 다카미네 조키치가 아드레날린을 발견하고 세균학자 기타사토 시바사부로가 1회 노벨상 수상자 후보에 이름을 올리는 등 20세기 초반부터 서양과 경쟁할 수준에 서 있었다고 한다. 1917년에 이화학연구소 설립 이후에는 물리학 분야도 급격한 발전을 이뤄 1950년 무렵 세계를 선도할 만큼 성장했다.
책의 특징은 물리학, 화학, 생리 의학, 원자력 공학 등 각 분야를 개척한 과학자들을 중심으로 연구 업적과 뒷이야기를 알기 쉽게 풀어낸 점이다. 그 과정에서 메이지 유신, 러일전쟁, 태평양전쟁, 패전과 전후, 그리고 최근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의 사회상이 펼쳐진다.
“동양에 없는 것은 두 가지다. 유형으로는 수리학, 무형으로는 독립심이다.” 이렇게 간파했던 개화기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가 기틀을 닦아 놓은 자연과학은 일본의 전쟁에 무기를 공급하는 데 쓰이면서 힘을 키워 갔다. 왁스를 섞어 폭발력을 크게 높인 이른바 ‘시모세 화약’은 러일전쟁 때 큰 공을 세운 것으로 기록된다. 중국 하얼빈에 설치된 731부대와 관련해선 일본 전역에서 모집한 연구자 1000여명이 세균전과 인체실험에 투입됐다고 전한다.
가장 눈여겨볼 대목은 바로 과학자의 의식이며 과학 발전과 관련한 사회 시스템의 가동이다. 과학자들이 모여 자발적으로 기초 연구의 산실을 일궈 낸 것을 비롯해 수직적인 상하관계를 없앤 사례, 끈끈한 사제 관계, 각자가 잘하는 일의 집중 같은 이야기들이 흥미롭다. “일본인의 폐단은 성공을 너무 서둘러 금방 응용 쪽을 개척해 결과를 얻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화학 연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순수 이화학의 연구 기초를 다져야 합니다.” 이렇게 외쳤던 응용 화학자 다카미네 조키치가 1917년 설립한 이화학연구소(리켄)는 이후 100여년 동안 일본의 기초과학 발전을 이끌었다. 강의에 나오는 방정식조차 이해하지 못할 만큼 수학이 약했지만 실험에선 탁월했던 고시바 마사토시가 2002년 노벨상을 받게 된 과정도 눈에 띈다.
일본 과학의 발전사에선 배울 점이 많아 보인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개척이며 잇따른 전쟁이 자연과학 발전에 상승효과를 냈다는 사실은 조금 불편하게 다가온다. 그 불편한 진실을 의식했기 때문인지 저자는 후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일본인이 서양의 사상과 철학, 도덕, 종교를 깊이 이해하는 것은 물리학에 비해 지극히 어려웠다. 일본인이 이제부터 배워야 할 서양의 지혜는 사회의 민주제도라든가 개인의 독립, 자존 등 무형 문화라고 생각한다.”
김성호 선임기자 kimus@seoul.co.kr
2016-10-08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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