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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화’·‘저비용’… 원자력에 붙는 모순된 수사

‘녹색’·‘평화’·‘저비용’… 원자력에 붙는 모순된 수사

하종훈 기자
하종훈 기자
입력 2022-09-29 17:44
업데이트 2022-09-29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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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원자/제이컵 햄블린 지음/우동현 옮김/너머북스/488쪽/3만원

미국 주도 원자력 계획 과정 담아
자국 패권 유지 위해 ‘평화’ 이용
에너지 제공 빌미로 핵기술 이전
방사능 위험·핵무기 확산 부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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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1953년 12월 유엔총회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 창설을 제안하고 있다. 유엔 제공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1953년 12월 유엔총회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 창설을 제안하고 있다.
유엔 제공
최근 정부가 탈원전 기조를 폐기했음에도 저비용·청정 에너지로 규정된 원자력을 둘러싼 논쟁은 그치지 않고 있다. 깨끗하고 안전하며 풍요로운 미래를 약속한 원자력에 대한 전 세계적 신념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역사의 궤적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제이컵 햄블린 미국 오리건주립대 역사학과 교수의 저서 ‘저주받은 원자’는 1950년대 이후 70여년간 미국 주도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 계획이 세계에서 어떻게 전개됐는가를 종합적으로 다룬 국제사 기록이다.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려고 평화적 핵기술을 이용해 온 역사를 통해 원자력을 다층적으로 볼 실마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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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국제 학술대회’ 개막식. 참석자들이 미국의 실험용 비등수형 원자로 모형을 보고 있다.  유엔 제공
1955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국제 학술대회’ 개막식. 참석자들이 미국의 실험용 비등수형 원자로 모형을 보고 있다.
유엔 제공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파괴한 원자폭탄과는 다른 ‘새로운 원자’를 세상에 내놓았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원자력이 질병을 치료하고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고 모두에게 풍족한 에너지를 제공해 과거 식민지였던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가속할 것이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이는 자국 수소폭탄 실험 계획에 쏟아질 세상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미국 역대 정부는 각국의 핵 프로그램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세계 우라늄·토륨 시장을 장악했다. 핵무기 확산의 위험에도 산유국들에까지 원자력 기반 시설 설치를 독려한 이면에는 석유를 확보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미국이 집중적으로 원자력의 긍정적 측면을 부각시키자 원자력은 공포의 대상에서 욕망의 대상으로 전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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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테헤란대학의 연구용 원자로는 이슬람 혁명(1979년) 이전인 1967년 가동되기 시작했고, IAEA는 전문가들을 파견해 훈련을 지원했다. 1970년 이란인 과학자들이 방사성 동위원소 관련 실험을 하는 모습. 유엔 제공
이란 테헤란대학의 연구용 원자로는 이슬람 혁명(1979년) 이전인 1967년 가동되기 시작했고, IAEA는 전문가들을 파견해 훈련을 지원했다. 1970년 이란인 과학자들이 방사성 동위원소 관련 실험을 하는 모습.
유엔 제공
각국 지도자들은 핵기술 이전을 최대화하고자 미국의 수사를 받아들이면서도 핵무기 비확산 문제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한다. 일본은 핵무기를 개발할 수 있는 조건을 갖췄음에도 철저히 미국의 하위 파트너를 자처했고, 이스라엘은 미국의 비호하에 핵무기를 개발했다. 반면 이라크는 핵무기 개발을 철저히 숨기려고 했다. 평화적 핵기술은 잠재적인 핵무기 개발 기술이었다는 점에서 원자력은 결코 평화로운 적이 없었고 핵무기의 확산을 부추겼을 뿐이다.

기술 종속에 따른 신식민주의는 원자력 분야에서도 예외가 없었다. 수많은 개도국들이 핵기술을 채택했지만 전문성, 장비, 연료 측면에서 미국과 서유럽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60년 프랑스는 첫 원폭 실험을 할 때 자국이 지배하는 알제리를 실험장으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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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한스 블릭스(왼쪽) IAEA 사무총장이 이라크의 핵 능력을 평가하고 있다. 유엔 제공
1991년 한스 블릭스(왼쪽) IAEA 사무총장이 이라크의 핵 능력을 평가하고 있다.
유엔 제공
핵무기 보유 감시와 평화적 핵 사용을 위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대한 비판도 눈길을 끈다. IAEA는 개도국에서 수많은 프로그램에 착수했는데, 1960년대 들어 세계보건기구(WHO), 유엔식량농업기구(FAO)와 격렬하게 충돌했다. WHO 과학자들이 방사성 낙진의 위험에 대해 언급하자 IAEA는 WHO를 밀어내려 했다. IAEA는 방사선을 오염 물질로 묘사하는 어떠한 서사에도 단호하게 대항했고 방사선을 활용해 곡물 내 단백질량을 늘리는 등 원자력이 세상의 질병, 기근, 인구 과잉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돼 있음을 다양하게 홍보했다. 광범위한 회원국을 보유한 IAEA는 원자력이 가져올 ‘녹색 혁명’의 청사진을 과장해 미국의 영향력 확대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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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탈원전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다만 ‘평화적 원자력’이라는 약속이 수십년간 세계인의 공포와 야심을 유리하게 이용해 패권을 유지하려는 미국의 도구였다는 점에 주목한다. 결론적으로 원자력 발전을 단순히 에너지 수요와 기후 변화를 해결하는 기술적 선택지로만 여기는 것은 지구적 핵 질서의 불신을 가리는 프레임이라고 저자는 단언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에서 원전 개발로 누가 이득을 볼지, 그에 따른 비용은 누가 어떻게 치를지에 대해 생각해 볼 만한 시사점을 제공하는 책이다.

하종훈 기자
2022-09-30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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