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페이지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69) 충남 연기군 봉산동 향나무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69) 충남 연기군 봉산동 향나무

입력 2012-03-01 00:00
업데이트 2012-03-01 00:00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470년 내려온 뿌리깊은 孝心 문중의 상징으로 뿌리 내리다

나무와 더불어 살아온 옛 사람들은 어버이가 그리울 때도 나무를 심었다. 효도를 삶의 중요한 가치로 삼던 시절, 어버이가 돌아가시면 자식들은 묘 앞에서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 자식들은 어버이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 나무를 심었고, 나무는 효성을 실천한 선조의 상징으로 남았다. 후손들은 선조가 남긴 한 그루의 나무를 대를 이어 정성껏 지키게 된다. 사람들은 나무를 바라보며 올바른 사람살이를 실천한 선조를 기억했고, 나무를 지키며 선조의 선행 혹은 효행을 떠올렸다. 시대가 변하고 삶의 가치 기준이 바뀐다 해도 끝내 변할 수 없는 참 삶의 알갱이는 나무와 함께 나무처럼 변함없이 오래 남게 마련이다.

이미지 확대
용틀임하듯 꼬이고 비틀리며 솟아오른 봉산동 향나무의 줄기와 넓게 펼친 나무 그늘.
용틀임하듯 꼬이고 비틀리며 솟아오른 봉산동 향나무의 줄기와 넓게 펼친 나무 그늘.
●효를 중시한 강화최씨의 상징물

“12대조 강화최씨 중자 룡자 할아버지가 3년 시묘살이를 한 자리는 여기가 아니야. 묘는 여기서 좀 떨어진 자리에 있어. 시묘살이는 어버이의 묘 앞에서 하는 거잖아.”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 봉산리. 아늑한 농촌 마을에 낮게 웅크린 한 그루의 향나무 앞에서 최봉락(79) 노인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최씨의 후손들이 정성껏 지켜온 이 향나무는 470년 전 부친상을 당한 최중룡이 3년 동안 머리를 풀고 어버이의 묘 앞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심은 나무라고 알려졌다.

“이 자리는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살림을 이어온 자리야. 지금은 다 무너져 내렸지만, 이 집도 정말 좋은 집이었지. 처음에 선친의 묘소 앞에 심은 나무를 시묘살이를 마치고 살림집에 돌아오시면서 옮겨 심었을 수도 있겠지. 어쨌거나 우리 조상의 지극한 효심을 상징하는 나무지.”

천연기념물 제321호인 이 나무의 고유명칭은 ‘연기 봉산동 향나무’다. 행정구역명으로는 조치원읍 봉산리이지만, 마을의 옛 이름인 ‘봉산동’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썼다. 강화최씨의 집성촌인 봉산동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을 뒷산 골짜기에서부터 너른 벌까지 모두 최씨 문중의 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마을에 남아있는 강화최씨는 40여 가구 가운데 절반도 안 된다. 또 문중 소유의 토지 대부분은 일제 식민지 시대 때의 측량 사업 과정에서 소유권을 잃었다. 이제 강화최씨의 땅으로 남은 건 향나무가 서 있는 자리 주변뿐이다. 최 노인은 이 조그만 땅이 조상의 얼이 담긴 유일한 자리이고, 향나무는 문중의 상징이자 자랑이라고 강조한다.

●넓게 펼친 가지와 용틀임하는 줄기

대개의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을 국가에서 소유하는 것과 달리 봉산동 향나무가 여전히 최씨 문중의 사유지로 남은 것은 그래서다. 최근 향나무 주위의 최씨 문중 소유 구역에 울타리를 치고 대문도 세웠다. 그와 함께 천연기념물 보호구역 가장자리에 근사한 서양식 가옥을 새로 지었다.

향나무와 새 집 사이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어 잘 가꾼 정원을 떠올리게 한다. 아늑한 정원의 주인공은 단연 향나무다. 나무는 키가 3m, 줄기둘레가 2.8m 정도로, 비교적 작은 키에 속한다. 무성하게 뻗은 나뭇가지가 이룬 그늘이 깊어서 멀리서 보면 나무 줄기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왜소한 나무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사방으로 나뭇가지가 펼친 품은 감탄사가 나올 만큼 굉장하다. 땅에서 2m쯤 되는 높이에서부터 평평하게 뻗어나간 나뭇가지는 무려 11m를 넘게 뻗었다. 게다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사방으로 고르게 뻗어 나무 그늘에 빈틈이 없을 정도로 촘촘한 지붕을 이뤘다.

곳곳에 10여 개의 굵은 버팀목으로 지지해 주지 않았다면 넓게 뻗은 가지들은 이미 오래전에 제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부러졌거나 땅바닥에 드러누웠을 것이다. 한눈에도 문중에서 얼마나 정성을 들여 가꾸어 온 나무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줄기를 자세히 보기 위해 나무 그늘로 들어서려면 허리를 잔뜩 구부리고 엉금엉금 기어야 한다. 그러나 예전에는 허리를 굽히지 않고도 다닐 수 있었다고 한다. 대개의 집안 잔치를 이 나무 아래에서 했다고 최 노인은 덧붙인다. 지금의 형상으로 보아서는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일이다. 나무의 키가 지금처럼 낮아진 것은 나무를 문화재로 지정한 1982년 이후 나무 둘레에 단을 쌓고 흙을 돋우면서부터라고 한다.

가지펼침 못지않게 놀라운 건 신비로운 줄기다. 고작해야 2m를 넘지 않게 올라온 나무 줄기는 다양한 모습을 가졌다. 땅에서 솟아오른 줄기는 먼저 제 무게가 버겁다는 듯 비스듬히 바닥에 누워 마치 다리쉼을 하며 한숨 돌리는 모습을 했다. 그러고는 다시 힘을 일으켜 비틀리고 꼬이면서 솟구쳤다. 그러다가 나뭇가지 위에 내려앉은 하늘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듯 나무 줄기는 주춤거리며 수평으로 배배꼬였고, 이내 다시 수직으로 방향을 돌려 솟아오른다. 영락없는 용틀임의 형상이다.

●가문 대대로 정성껏 지켜온 ‘자랑’

“가문 어른들의 정성이 대단했어. 나뭇가지 하나도 예사로이 보지 않고 일일이 버팀목을 해 주었지. 쇠로 된 지지대를 세우면 편했겠지만, 금극목(克木)이라고, 쇠는 나무를 죽이거든. 그래서 뒷산에서 아까시나무를 구해 와 연못에 오래 담갔다가 말려서 쓰곤 했지.”

조상의 얼이 담긴 나무를 후손들이 정성들여 지키는 일이야 그리 대단한 일이라 할 수 없을 게다. 특히 당시 사람살이에서 가장 높은 가치로 꼽던 효성을 실천한 선조의 얼이 담긴 나무인 바에야 오죽했겠는가 싶기도 하다.

봉산동 향나무를 바라보면 한 그루의 나무를 지키는 것이 결국은 한 시대의 정신적 가치를 지키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강화최씨 후손이 대를 이어 지켜낸 건 한 그루의 나무뿐 아니라, 나무 안에 담긴 참다운 사람살이의 알갱이, 바로 그것이다.

글 사진 연기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경부고속도로의 청주나들목에서 연기 방면의 국도 36호선으로 8㎞쯤 가면 조치원역에 닿는다. 연기군 시내를 거쳐 고려대 조치원캠퍼스 쪽으로 가면 조치원여자고등학교 사거리(조여고사거리)가 나온다. 여기에서 조치원여고 쪽으로 들어선 뒤, 1.1㎞ 직진하면 봉산1리 마을 입구 삼거리에서 봉산동 향나무의 위치를 알리는 커다란 안내판을 만나게 된다. 나무는 250m쯤 안쪽에 있는데, 나무 앞에 주차할 공간이 없으니, 도로 주변의 적당한 자리에 주차하고 걸어가는 게 좋다.

2012-03-01 17면

많이 본 뉴스

‘금융투자소득세’ 당신의 생각은?
금융투자소득세는 주식, 채권, 파생상품 등의 투자로 5000만원 이상의 이익을 실현했을 때 초과분에 한해 20%의 금투세와 2%의 지방소득세를, 3억원 이상은 초과분의 25% 금투세와 2.5%의 지방소득세를 내는 것이 골자입니다. 내년 시행을 앞두고 제도 도입과 유예,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맞서고 있습니다. 당신의 생각은?
제도를 시행해야 한다
일정 기간 유예해야 한다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
모르겠다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