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새 도래지 천수만의 겨울

철새 도래지 천수만의 겨울

입력 2012-12-06 00:00
업데이트 2012-12-06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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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두 번 천상의 공연…40만 무희들 하늘을 노닐다

해거름이었습니다. 방울 토마토를 닮은 빨간 해가 간월호를 붉게 물들이더니, 이윽고 산자락 저편으로 넘어갑니다. 때맞춰 호수 주변 들녘도 수선스러워집니다.

철새 한두 마리의 울음소리가 들리는가 싶던 순간, 들녘 전체가 순식간에 시꺼멓게 변합니다. 낙곡을 주워 먹던 기러기들이 일제히 땅을 박차고 날아오른 거지요.

초저녁 달 위로 어지러이 날던 기러기들은 곧 간월호 안쪽의 모래톱 주변에 줄지어 내려앉습니다. 들짐승의 위협을 피해 비교적 안전한 호수에서 휴식을 취하려는 겁니다.

입이 떡 벌어지는 이 같은 풍경은 충남 서산의 천수만 간척지 일대에서 하루 두 차례 어김없이 펼쳐집니다. 철새 탐조의 계절입니다.

기러기와 흑두루미, 큰고니 등 겨울 진객들이 줄줄이 한반도로 날아들고 있습니다. 이역만리에서 찾아오는 새들의 우아한 날갯짓과 화려한 군무를 보자면 우리들 마음도 훨훨 날아오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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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철새가 찾아오는 천혜의 쉼터, 천수만 간척지. 멀리 뒤쪽에 보이는 갈대 무성한 와룡천에 행여 사람에게 들킬까, 맹수에게 잡힐까, 보일 듯 말 듯 철새들이 숨어 있다.
겨울 철새가 찾아오는 천혜의 쉼터, 천수만 간척지. 멀리 뒤쪽에 보이는 갈대 무성한 와룡천에 행여 사람에게 들킬까, 맹수에게 잡힐까, 보일 듯 말 듯 철새들이 숨어 있다.


● 수십만 철새들의 영토

천수만 간척지는 충남 서산시와 태안, 홍성 등에 걸쳐 있는 세계적인 철새 도래지다. 천수만 간척지 A, B지구에서 가을걷이 후 남겨진 낙곡이 풍부한 먹잇감을 제공하는 데다, 모래톱과 갈대밭 등 은신처가 많아 철새들에게 천혜의 쉼터 노릇을 한다.

서산 버드랜드의 박민철 주무관에 따르면 11월 말 현재 천수만 일대에 와 있는 겨울 철새는 대략 10만 마리로 추산된다. 쇠기러기 등 기러기류가 4만~5만 마리로 다수를 차지한다. 여기에 조만간 가창오리가 합류하면 단박에 40만~50만 마리로 불어난다. 천연기념물 등 진객들도 많다. 흑두루미(천연기념물 228호)는 200여 마리, 황새(천연기념물 199호)는 5마리, 노랑부리저어새(천연기념물 205호)는 30여 마리가 관측됐다. 하나같이 멸종 위기에 처해 국제적인 보호를 받고 있는 귀한 새들이다. 큰고니 등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철새가 늘면서 이들을 잡아먹고 사는 맹금류도 점차 늘고 있다. 말똥가리는 30여 마리가 관측됐고 참매와 잿빛개구리매, 흰꼬리수리, 항라머리검독수리 등도 드물지만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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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무지존’ 가창오리·도도한 흑두루미 한자리에… 겨울진객들 우아한 춤사위에 입이 떡 벌어지죠
‘군무지존’ 가창오리·도도한 흑두루미 한자리에… 겨울진객들 우아한 춤사위에 입이 떡 벌어지죠 간월호 모래톱 주변에서 쉬고 있던 기러기 수만 마리가 먹이를 찾아 일제히 날아오르고 있다. 가창오리의 군무를 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한 이런 광경들은 하루에도 수차례 반복된다.
철새 연구 등 특별한 목적이 아닌 경우 관광객들의 탐조 범위는 간척지 안쪽의 간월호를 넘지 않는 게 좋다. 불필요하게 철새들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가장 많은 철새들을 잘 볼 수 있는 곳도 간월호 주변이다. 서산시에서 간월호를 중심으로 1~3탐조대를 조성해 뒀다. 추천할 만한 곳은 A지구 방조제와 방조제 끝 쪽의 간월도 입구다. 간월호 모래톱과 가까워 늘 다양하고 많은 철새들을 관찰할 수 있다. 해거름에 흑두루미 등 희귀 조류들이 밤을 보내기 위해 찾는 곳도 이 지역이다. 조만간 찾아올 가창오리의 군무 또한 이곳에서 볼 확률이 가장 높다.

간월호 인근 지역, 그러니까 간척지에서 낙곡 등을 먹는 기러기를 관찰하거나 와룡천과 해미천 등에서 쉬고 있는 오리류를 보겠다면 버드랜드에서 운영하는 탐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 좋겠다. 조류 전문가의 설명을 들으며 차분하게 다양한 철새를 관찰할 수 있다.

탐조에 가장 좋은 시간대는 오후 4~6시 해질녘이다. 가창오리들이 먹이를 찾아 날고, 흑두루미와 기러기 등이 쉬기 위해 날개를 접는 시간이다. 수십만 마리의 철새들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셈이다. 노을이 간월호를 붉게 물들이는 장면도 빼어나다.

●‘교태로운’ 흑두루미 등 진객들과의 조우

천수만에서 요즘 가장 관심을 끄는 철새는 흑두루미다. 두루미과에 속하는 흑두루미는 외관이 두루미와 다소 다르다. 두루미가 고고한 기품의 귀부인 이미지라면, 흑두루미에게선 규방을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가는 여인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흑단을 두른 듯, 윤기 흐르는 날개와 봉긋 솟은 꼬리를 보자면 도도한 자태 뒤에 열정을 숨긴 무희가 떠오르기도 한다.

흑두루미는 시베리아 등에서 번식을 하고 한반도 일부와 일본 가고시마현 이즈미시에서 겨울을 난다. 천수만은 흑두루미들이 일본을 오가는 길목의 휴식처 노릇을 하는 곳. 봄·가을 이동 시기엔 수천 마리가 머물기도 한다.

서산 지역엔 철새를 아끼는 사람들이 참 많다. ‘김신환 동물병원’을 운영하고 있는 김신환 원장도 그중 한 명이다. 여러 철새 가운데 흑두루미를 특히 좋아한다는 그는 해마다 볍씨를 사서 철새들에게 뿌려준다. 풍족하지는 않되, 근근이 겨울을 버텨낼 정도의 양이다. 이른바 ‘먹이 나누기’다. 먹이를 주는 사육과는 다른, 공생의 뜻이 담긴 표현이다. 김 원장은 “전 세계 흑두루미들이 일본의 이즈미 반도에 모여 겨울을 나는데, 혹시 전염병이라도 번지면 종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는 거 아니냐.”며 “녀석들이 천수만과 순천만 등에 분산돼 월동할 수 있게 하려는 뜻도 있다.”고 설명했다.

요즘 천수만에서 관찰되는 흑두루미는 200여 마리. 밤새 간월호에서 쉬다가 새벽녘에 인근 농경지로 먹이를 찾아 뿔뿔이 흩어진 뒤 다시 저녁 무렵 간월호로 돌아오는 패턴을 이어가고 있다. 해질녘 간월호 3탐조대를 찾으면 거의 예외 없이 흑두루미 무리와 만날 수 있다. 호수 가운데 모래톱 주변을 몇 바퀴 선회한 뒤 천천히 내려앉는데, 기품 있고 우아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 많던 가창오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해질녘 겨울 진객들이 벌이는 군무를 보고 나면 진하게 아쉬움이 남는다. 수십만 마리의 가창오리들이 벌이는 ‘원조’ 군무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창오리들이 자취를 감춘 건 전국적인 현상이다. 예년의 경우 시베리아에서 넘어온 가창오리들이 먼저 천수만에 들러 인근 지역의 먹이를 ‘폭풍 흡입’한 뒤, 군산의 금강 하굿둑, 경남 창원 주남호, 전남 해남 고천암 등으로 이동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동 경로야 어떻든 가창오리가 우리나라에서 겨울을 나는 건 ‘일상적인 일’에 속했다.

한데 올해는 벌써 두 달 가까이 가창오리가 눈에 띄지 않고 있다. 천수만에 ‘선발대’ 1만여 마리가 찾아온 게 고작이고, 다른 지역은 ‘척후병’ 수백 마리 정도만 관찰되고 있다. 그 많던 가창오리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버드랜드 박민철 주무관은 “올해 처음 벌어진 일”이라며 “시베리아 번식지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전 세계 가창오리 가운데 90%는 우리나라에서 월동한다. 나머지 10% 정도만 중국 등에서 겨울을 난다. 따라서 가창오리 전체가 이동을 하지 않고 있거나, 월동지를 다른 나라로 바꾼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글 사진 서산 손원천 여행전문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41)

▲가는 길 서해안고속도로 홍성 나들목으로 나와 안면도 방면 이정표를 보고 곧장 가면 서산 버드랜드(664-7455)와 만날 수 있다. 버드랜드(www.seosanbirdland.kr)에서 일반탐조와 심층탐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일반탐조는 45인승 버스에 나눠 타고 간월호 1~3탐조대 중심으로 살핀다. 주말에만 하루 4회 운영한다. 5000원. 심층 탐조는 탐조 시 주의사항 등에 대한 사전 교육을 받은 뒤 1~3탐조대는 물론 와룡천 등 작은 지류를 돌며 다양한 철새들을 망원경으로 관찰한다. 주말에만 하루 두 차례 운영된다. 1회 15명만 참여할 수 있다. 신청은 홈페이지에서 받는다. 서산시 문화관광과 660-2499.

▲맛집 천수만 간척지 바로 앞은 어리굴젓의 명산지 간월도다. 이맘때 ‘밥도둑’은 영양굴밥. 대추와 호두, 은행 등을 굴과 섞어 지은 밥에 양념장을 살짝 뿌려 비빈 뒤 어리굴젓을 얹어 먹는다. 서산시청 뒤 진국집(664-4994)은 토속음식 ‘게국지’로 소문났다.

2012-12-06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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