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임] 책보, 책갈피마다 빗소리가 들어 있는

[속삭임] 책보, 책갈피마다 빗소리가 들어 있는

입력 2010-09-05 00:00
수정 2010-09-05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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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늘 예고 없이 내렸다. 아침부터 비가 오면 비닐우산이라도 준비하여 등교하지만 오후에 내리는 비는 속수무책이었다. 먼저 책보를 펴고 한 귀퉁이에 책을 그리고 그 위에 도시락과 필통을 얹고 둘둘 말아 끝자락에 옷핀을 꽂아 풀어지지 않도록 한 다음 양쪽 끝을 잡고 어깨에 대각선으로 묶으면 등교 준비는 끝이다.

그래서 갑자기 비가 내리기라도 하면 옷이고 책이고 모두 젖어버린다. 어디서 비료부대라도 만나면 땡이다. 일단 책보를 돌돌 감아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고 10리 길을 뛰다 걷다를 반복하여 집에 오면 먼저 책보를 풀고 젖은 책들을 꺼내 마루에다 펼쳐놓고 텅 빈 집 봉당에 앉았다.

베란다에 서서 빗소리를 듣고 있다. 주말 오후 갑자기 내리는 빗줄기가 제법 거세다. 유리창에 부딪히고, 더러는 은행나무 이파리에 내려앉은 빗방울은 이미 갈 길을 정한 듯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흘러간다. 빗물을 바라본다. 갈라지고 합치고 또 갈라지는 저 빗물은 얼마를 더 흘러야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 눈을 돌려도 자꾸 따라오는 빗소리가 지난 시간 속으로 등을 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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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이 유리창에 만든 무늬 너머로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커다란 우산에 장화를 신은 아이들 등에는 예쁜 책가방이 매달려 있다. 산성비에 온몸을 꼭꼭 숨긴 아이들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빗물의 촉촉함을 알 수 없을 거다. 처마에 쪼그리고 앉아 듣는 굵은 빗줄기의 속삭임을 듣지 못할 거다. 어깨에 매달린 책보에서 달각거리는 빈 도시락 소리, 그 박자에 맞추어 달리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알 수 없을 거다.

책장을 넘긴다. 갈피마다 빗소리가 들어 있다. 지천명을 넘어온 빗소리가 기억의 저편에서 쏟아진다.

글·사진_ 문근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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