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전북 진안군 백운면 원촌마을

[어느 날 갑자기] 전북 진안군 백운면 원촌마을

입력 2010-10-17 00:00
업데이트 2010-10-17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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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글씨가 흰구름 위를 걸어요! - 꾹꾹 눌러쓴 예쁜 간판들

흰구름 마을로 가는 안내장. 흰구름 마을로 향하는 마을버스는 하루에 몇 대 없어요.

그러니 버스 시간을 알아두세요. 시계도 꼭 챙기세요.

한데, 버스를 기다릴 때나, 버스에 올라타서는 시계를 보진 말아요.

그냥 정류소 의자에, 버스 의자에 몸을 축 늘어뜨리세요.

옷걸이에서 떨어진 목이 늘어난 아버지의 런닝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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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놓다

때론 목적했던 여행지보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보낸 시간들이 더 많은 추억을 안겨줍니다. 바로 이곳, 흰구름마을이란 귀여운 애칭으로 불리는 전북 진안군 백운면 원촌마을을 향하는 길 위에서 보냈던 시간들처럼.

흰구름마을에 들어가기 위해선 먼저 길고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앞 유리창에 ‘살기 좋은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이라는 문구가 쓰인 버스 세 대를 눈앞에 두고 사람 때로 누그러진 소파에 몸을 묻고 버스 시간을 기다립니다. 하루에 몇 대 들어가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사람들을 기다리는 버스 사이에서 저만 자꾸 시계를 봅니다. 째깍째깍… 초를 다투는 도시의 시간에 익숙해진 제겐 며칠째 비가 오락가락하는 장마철만큼이나 지루한 표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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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게 오른 버스는 또 퍽이나 여유가 넘칩니다. 사람 없는 빈 정류소마다 운전기사는 꼬박꼬박 버스를 멈추고 손님을 기다립니다. 높은 버스 계단을 오르기 힘든 걸음 불편한 어르신이라도 탈라치면 벌떡 일어나 손을 잡아주기도 하고, 창문을 열고 길 가던 아는 사람을 붙잡고 말을 건네기도 합니다. 시내(市內)로 나가는 마지막 버스 시간을 체크하며 또 다시 시계를 보며 ‘참을 인’자를 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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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되겠습니다. 바쁘게 돌아가던 시간을 잠시 놓기로 합니다. 하루를 계획했던 일정에 하루를 보탭니다. 조금은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버스는 아스팔트를 벗어나 골골샅샅 뻗은 길을 따라 마을 깊숙한 곳까지 들어갑니다. 버스 창에 머리를 기대고 창밖을 바라봅니다.

둘레가 온통 푸른 논밭 사이사이 세간들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낮은 담장의, 담장 없는 마당 넓은 집들이 있습니다. 주인이 비운 집을 지키는 건 낮잠을 청하는 누렁이와 옹기종기 자리 잡은 장독들. 그리고 집 주인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빨랫줄에 빨래…. 뭘까요? 이 알 수 없는 편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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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이곳 사람들이 궁금해집니다. 진안의 최고 비경 마이산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버스 안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거시기네, 새로 들어온 외국인 새댁·돈 벌어 외국 관광을 보내준 큰아들·다 가는 서울 안 가고 농사 짓는다며 부모 속 썩이는 막내. 모든 집들이 거시기네로 시작되지만 못 알아듣는 사람은 저뿐입니다. 정처 없이 떠돌던 남의 집 이야기는 또 서로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갑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분들은 밥을 많이 먹어도 배가 홀쭉해 힘을 못 쓰는 할아버지, 비만 올라치면 허리가 쑤셔 귀신같이 날씨를 알아맞히는 할머니와 경운기 바퀴에 다리를 깔린 후 다리가 불편한 또 다른 할머니 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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꾹꾹 눌러 쓴 예쁜 손글씨 이름표

흰구름마을은 백운면의 면소재지이자 섬진강 발원지인 데미샘이 있는 마을입니다. 가게마다 이름표처럼 단 꾹꾹 눌러쓴 예쁜 손글씨 간판에 절로 발길을 멈추게 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마을의 변화. 다들 도회지로 떠나고 노인들만 남은 마을에 그렇게 사람들이 다시 찾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시골 작은 마을에 작은 변화가 일기 시작한 건 2007년 3월. 인근의 전주대학교 도시환경미술학과 이영욱 교수가 간판을 재정비하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일명 공공미술프로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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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가 좋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알아만 보면 됐지, 간판 하나 바꿔 단다고 크게 달라질 것 없다’는 생각에 마을 주민들은 이영욱 교수의 제안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영욱 교수의 끈질긴 설득과 대부분의 사업비를 지원한다는 조건에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여느 시골 풍경과 다를 바 없는 마을이 새 옷을 입는 데 걸린 시간은 3개월이면 충분했습니다. 간판 제작에 필요한 대부분의 사업비는 약속대로 전주대누리사업단에서 보탰습니다. 간판 1개의 제작비는 평균 40~50만 원. 이중 마을 주민들은 10%에 해당하는 4~5만 원을 냈습니다. 도시를 정비한다며 옛 건물들을 모두 부수고, 그것도 모자라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온 이들까지 내모는 모습과는 대조를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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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생각보다 훨씬 작습니다. 걸어서 돌아보는 데 1시간이면 충분합니다. 비록 두 눈을 휘둥그레 만드는 풍경은 없지만 소소한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버스 정류소를 겸하는 ‘백운약방’ 간판은 하늘을 바탕으로 흰구름이라는 글씨를 새겨 넣었습니다. ‘희망건강원’에는 지붕 위에 올라 선 염소가 한가로이 노닙니다. ‘풍년떡방앗간’에는 벼 이삭을 물고 가는 새가, ‘흰구름할인마트’ 간판에는 말 그대로 두둥실 뜬 흰구름이 그려져 있습니다.

마을을 찬찬히 둘러보다 구수한 밥 냄새에 이끌려 걸음을 멈춥니다. ‘육번집’. 특이한 이름의 내력을 물으니 주인 할머니는 처음 가게 문을 열었을 때 간판도 없이 장사를 시작했는데, 그때 전화번호가 ‘6번’ 이어서 사람들이 그냥 ‘육번집’이라고 불렀고, 지금까지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전화번호가 6번이었던 시절, 벌써 30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 오랜 시간 지켜온 자리인 만큼 이곳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애정이 남달라 보입니다. 특히 마을 남정네들에겐 이곳은 만남의 장소이자, 놀이의 공간입니다. 오락가락 장맛비 때문에 잠시 일손을 놓은 마을 남정네들은 ‘육번지’ 옆 공터에 모여 윷을 놉니다. 제법 무리를 이룬 것으로 보아 한 두 마을에서 모인 사람들은 아닙니다. 윷을 놀다 허기가 지면, 간만에 만난 이웃 동무에 반가워, 윷을 이겨 재미있어서, 아깝게 역전 당해 분해서 등등 이유로 ‘육번지’에 삼삼오오 몰려가 돼지국밥에 막걸리 한 잔을 곁들입니다.

참 느린 하루가 빠르게 지나갔습니다. 저는 지금 흰구름 위를 걷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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