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진, 희망이라는 간이역에 신묘년의 해가 떴습니다. 밝은음자리표가 하나 붉게 떠올랐습니다. 올해는 희망에 등을 기대도 좋을까요? 가슴속에 희망을 품고 미래를 탐험해도 좋을까요? 지금의 냉전을 걷어내고 해안선과 나란히 달리는 저 철길을 따라 시베리아까지 갈 수 있기를 갈망해 봅니다. 단지 희망을 품었을 뿐인데도 벌써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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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진 일출을 보기 위해 적송과 잡목이 우거진 7번 국도를 달렸습니다. 불빛 한 점 없는 산중, 전조등 불빛에 핏발이 섰습니다. 내 눈에도 핏발이 섰습니다. 그나마 방향이 같은 차들이 있어 위안이 됩니다. 잠시 차를 세우고 산등성이를 올려다봅니다. 산은 쉽게 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눈은 점점 더 어두워져 마음까지 어두워집니다. 길을 이끌던 달빛도 흐려지고 외딴길을 혼자 달려온 내 숨 가쁜 그림자만 비상등처럼 깜박이고 있습니다. 나는 자꾸 가던 길을 놓치고 애꿎은 밤안개만 걷어찹니다. 깊게 패인 바퀴자국이 머릿속까지 이어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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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꺼진 숲에서 산비둘기가 날아올랐지만 볼 수 없습니다. 어두워진 마음 탓입니다. 이정표는 자꾸 지워집니다. 아니, 찾지 못한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입니다. 외딴 산길에서 잠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합니다. 그러나 초조해하거나 서두르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길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때였을까요? 저 멀리 동해바다에서 귀신고래의 울음소리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환청이었을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귀신고래의 귀환을 꿈꿔온 이들이 있습니다. 희망이지요. 그러나 부질없다고 치부해버리기엔 동해바다는 너무 푸르고, 귀신고래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은 너무 간절합니다. 어둠을 헤치고 파도소리가 들려옵니다. 희망이라는 간이역, 정동진이 지척입니다. 정동진에 가면 고래를 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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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명(燈明), 정동진 바로 곁에 등불로 밝힌 바닷가가 있습니다. 겨울날 등명에서 바라본 초승달이 어찌나 맑은지 온몸이 시려옵니다. 오죽하면 등명일까요. 한 칸 열차가 등명의 새벽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움의 열차입니다. 왜 하필 등명 바닷가에만 서면 누군가가 그리워지는 걸까요? 수평선에 걸린 집어등이 이 대책 없는 그리움을 밝힙니다. 파도의 용틀임에 머리칼이 젖어듭니다. 마음도 젖어듭니다. 보름달이 뜬 등명 바닷가를 상상하면서 정동진역을 향해 발길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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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명에서 자동차로 3분 거리에 있는 정동진역은 희망이라는 간이역이라 불러도 좋은 조그마한 역사(驛舍)입니다. 드라마 <모래시계>의 촬영지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연인들의 필수코스가 되어버린 간이역. 해돋이 풍경이 아름다워 지금은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개발이 되어 예전의 그 마음속 풍경화 같은 고즈넉함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해돋이 관광열차에서 내린 억새꽃 같은 사람들이 해변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장작불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희망을 기다립니다. 저 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다 담을 만큼 커다란 태양이 수평선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폭죽이 터집니다. 신묘년, 세상 모든 사람들이 토끼처럼 순하고 영리하게 희망을 향해 나아가기를 기원해 봅니다.
일출을 뒤로 한 채 오죽헌을 향하다 강릉 초당 순두부에 빈속을 채웠습니다. 두부향이 매우 진하면서도 비리지 않은 것이 초당 두부가 가진 매력입니다. 허겁지겁 한 그릇을 우겨 넣었습니다. 오죽헌의 까만 대나무들은 여전히 푸른 이파리를 흔들고 있습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에 그려진 포도가 한겨울에도 싱싱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곳 오죽헌에서 위대한 사상가이자 철학자인 율곡 이이 선생이 탄생했습니다. 신사임당, 그녀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입니다. 오죽헌 담장 밖엔 강릉사립박물관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당간지주 앞에서 자연스레 주눅이 드는 건 무슨 까닭일까요.
오대산 전나무 숲에서 삼림욕을 즐기며 월정사에 올랐습니다. 동안거에 든 스님들의 머리 위에도 새해의 태양이 떴습니다. 월정사 8각9층석탑(국보 제48호)의 아름다움에 취해 탑돌이를 합니다. 염원은 소리가 나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속에 말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꼭꼭 옷깃을 여밉니다. 희망은 나눠 갖는 것이지요. 그래서 온 세상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찾아 상원사로 길을 재촉합니다. 상원사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국보 제36호)이 있습니다. 월정사에서 상원사 가는 길은 약 7킬로미터의 비포장 황톳길입니다. 운전 재미도 제법 쏠쏠합니다. 길에 쌓인 눈과 얼음에 발은 자꾸 미끄러집니다. 얼어붙은 황톳길에도, 산사 지붕 위에도, 풍경 속에도 햇발이 가득합니다.
희망을 탐험하기엔 더 없이 좋은 무박 2일이었습니다. 희망을 보았냐구요? 희망은 내 귓속에, 마음속에 그리고 내 발자국 속에도 있습니다. 길 위에 널린 게 다 희망이었습니다. 송어의 지느러미 위에도, 얼음장 밑에도, 고드름 끝에도 희망은 있었습니다.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것이 희망이었습니다. 희망, 그것은 내 마음속에 쟁여두고 평생 아껴 먹어야 할 양식이었습니다.
글·사진_ 고영 여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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