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 독립운동가의 후예가 부르는 ‘아리랑’

쿠바 독립운동가의 후예가 부르는 ‘아리랑’

입력 2015-08-13 09:10
업데이트 2015-08-13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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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택 선생 3녀 마르타 “한국은 우리의 뿌리…한인 후손의 얘기 널리 알려달라”

귀에 익숙한 우리 음식 몇 가지를 빼고 내내 스페인 어로 말하던 그는 ‘민족의 노래’ 아리랑만큼은 또렷한 우리말로 완창했다.

한국에서 약 1만3천㎞ 떨어진 쿠바에서 일제강점기 때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든든한 후원자 노릇을 한 고(故) 임천택(1903∼1985년) 선생의 3녀인 마르타 임(77·한국이름 임은희) 여사는 쿠바 아바나의 한인후손문화회관에서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와 ‘뿌리’ 한국에 대한 그리움을 절제된 목소리로 토해냈다.

기질상 선친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자평한 마르타 임 여사는 “아버지는 전형적인 한국 사람으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키고 싶어 하셨다”고 했다.

국립 아바나 대학 출신으로 마탄사스 종합대학에서 철학교수로 33년을 보낸 그는 역사학자이던 쿠바인 남편과 함께 10년의 공을 들여 ‘쿠바의 한인들’이라는 책을 펴내고 현재 1천명 정도로 파악되는 한인 후손들을 규합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다음은 마르타 임 여사와의 문답.

-- 먼저 자신을 소개해달라.

▲ 한인 이민자의 후손인 임천택과 김귀희의 9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어릴 적 잠시 한글학교에 다닌 것, 2000년 한국에서 한글 교사가 왔을 때 9개월간 한글을 배운 것이 전부다. 한국말을 할 수는 없지만, 마탄사스에 모여 사는 한인 후손들과 함께 한국 음식을 종종 해먹는다.

(우리말로) 김치, 잡채, 만두, 고추장, 비빔밥을 많이 먹었다. 김치가 제일 만들기 쉬웠는데, 어머니는 고추장을 직접 집에서 담그셨다.

-- 남편인 라울 루이스와 함께 한국 관련 책을 저술했는데.

▲ 다른 민족의 이민 역사는 모두 있으나 쿠바에 온 약 300명의 한인 이민 역사는 없다는 남편의 문제의식에 따라 2000년 책을 펴냈다.

다른 일을 하면서 틈틈이 자료와 정보를 모으느라 10년이 걸렸다. 각 지방에 흩어져 살던 한인 후손들의 연락처를 모아 쿠바 한인후손 연합회에 등록했다.

현재 한인 후손을 1천명 정도로 파악한다.

딸 셋은 한인이라는 정체성을 못느끼지만, 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외손녀가 한인이라는 뿌리에 관심이 많다. 어렸을 적부터 눈이 옆으로 찢어진 한국 사람처럼 눈을 손가락으로 벌리곤 했다. (마르타 임의 외손녀인 베아트리스 본데스 데 오키 루이스는 7월 4일 쿠바의 한국어 강좌가 개설 3년 만에 처음으로 배출한 수료생 11명 중 한 명이다.)

--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소개해달라.

▲ 아버지는 전형적인 한국분으로 엄격했지만, 내게는 아주 특별했다. 자식들이 모두 한인들과 결혼하기를 바랐을 정도다.

1950∼1956년 재쿠바 한인협회장을 지내신 선친은 늘 한국인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어 하셨다. 마탄사스에 살면서 카르데나스, 아바나를 오가며 한인 후손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김구 선생에게 전달했다.

쿠바 한인 2세들이 생존했을 때 얘기를 들으니 당시 가난했지만, 쿠바에 쌀은 조금 풍족했기에 끼니마다 쌀을 한 숟가락씩 모아 그것을 판돈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했다고 한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과부의 동전 얘기(동전 두 닢을 넣은 과부가 가진 모든 것을 털어 넣었다고 본 예수가 어떤 돈보다도 귀중하게 여겼다는 얘기)와도 같다. 그럴 정도로 우리에겐 소중한 돈이었다.

-- 아버지는 가족에게 어떤 분이셨나.

▲ 니켈 채굴과 농사를 병행한 아버지는 도덕적이셨으며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아버지는 학교에서 정규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한글, 스페인 어를 다 읽고 쓸 줄 알았다.

지식에 대한 갈증이 대단했다. 어렸을 때 멕시코로 넘어온 뒤 다시 쿠바로 옮겼음에도 늘 한국에 돌아가고 싶어했고 그러려고 돈을 모았다.

아쉽게도 교통사고로 뇌를 크게 다쳐 돌아가신 바람에 유언을 남기지는 못했다.

-- 당신에게 한국이란.

▲ (단호한 표정으로) 뿌리다. 어릴 적 집에서 늘 한국말만 했다. 쿠바에 사는 쿠바 사람이지만 지금도 한국과 그렇게 떨어진 느낌은 없다.

한류 바람을 타고 쿠바인들이 날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 인정해줘 기분 좋다.

수많은 한인 후손 중 하나인 우리의 얘기를 많은 한국인이 알아주고 우리와 서로 소통했으면 좋겠다.

소원이 있다면 1997년에 이어 두 번째로 한국에 가서 아버지의 묘를 살펴보고, 마탄사스에 있는 어머니의 유해를 아버지 옆에 합장하고 싶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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