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이 된 가수 신해철씨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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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사망 직후 ‘신해철 사망 원인은 패혈증’이라는 기사를 게재해 특종상까지 받았던 필자로서는 이 문제에 남다른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조용하지만 관심 있게 ‘그날 이후’의 변화들을 지켜봐 왔고, 지금도 거기를 주시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신해철법’은 끝난 것인가
관심을 끌었던 신해철법이 사실상 물 건너 갔습니다. 이번 19대 국회의 임기는 5월까지이지만 당장 4·13총선이 있어 다시 법안을 처리할 기회는 가질 수가 없으니까요. 이는 법안의 폐기를 뜻합니다.
이 법의 공식 명칭은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입니다. 2014년 4월 오제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개정안을 발의한데 이어 이듬해 김정록 새누리당 의원이 잇따라 발의했지요. 핵심 내용은 의료사고가 발생할 경우 의료기관이나 의사의 동의가 없더라도 즉시 조정 절차가 개시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법안의 배경에는 졸지에 유명을 달리 한 가수 신해철과 초등학생 전예강 양의 의료사고로 인한 사망사건이 있습니다. ‘신해철법’이라거나 ‘전예강법’이라고 한 건 이 때문입니다.
의료사고 피해자와 유족이 신속하고 공정하게 피해에 따른 배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이 법안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제동이 걸렸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 법안을 두고 의료단체와 환자단체 간에 치열한 대립과 갈등이 이어졌습니다. 병원협회와 의사협회 등 의료단체는 “악용의 소지가 커서 되레 국민 건강을 위협한다”고 우려했고, 환자단체에서는 “선용의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맞섰습니다.
이 법안의 처리 과정을 살펴보면 이해를 따지는 단체들이 각자 나름의 셈법으로 득실을 저울질하며 혹은 겉과 속이 다르게, 혹은 드러내놓고 견고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고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사안의 시비를 가리는 기준은 간단합니다. 무엇이 국민 다수의 이익에 부합한가, 그리고 어떤 선택이 사회 발전에 더 긍정적이냐를 따지면 되는 문제이니까요.
‘다수 국민의 이익’이라고 했지만,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의료사고의 책임을 건건이 규명하려 하면 불가피하게 의료행위가 위축되는 문제, 또, 의료의 본령을 지키주려 하면 환자의 권리가 침해받는 이 대립적 상황에서 무엇이 국민 다수의 이익에 부합하는 지를 가리는 일은 쉽지 않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필자는 국회를 먼저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회는 입법기관입니다. 많은 법이 국회에서 만들어지고 또 폐기됩니다. 그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라고 국민들이 큰 권한을 그들에게 위임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많은 권한과 권력이 주어지고, 평균적으로 따져 일한 것보다 과도하게 많은 세비를 받습니다.
그런 국회가 현실적으로 필요한 법안을 충실하게 심의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그 기관에 위임한 권한을 잘못 사용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신해철법도 그렇습니다. 어느 쪽도 편들거나 무시할 수 없는 ‘국민집단’이 팽팽하게 맞서 찬성과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는 상황인 만큼 선거를 치러야 하는 국회의원들의 선택의 폭이 좁을 것임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국회와 국회의원들이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관점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는 오로지 ‘법에 의해서만’ 유지되고 발전한다는 원론적 가치가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국회는 당연히 이 관점에서 노력하고, 고민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국회는 지금까지 그랬듯 항상 쉽게만 가려고 합니다.
●‘신해철법’의 논란 살피기
의사들의 관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의료계에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많은 의료사고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상당수 의료사고는 ‘사고’인 줄도 모르고 지나갑니다. 의료 주체인 의사들이야 대부분 사고 여부를 알겠지만, 드러내지 않으니까요. “사고로 보면 사고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특정 치료술이 개발되어 의료인에 의해 시행될 때 이미 일정한 오류나 사고는 예견된 것이며, 따라서 이런 예상의 범주에 들어있는 검사나 치료상의 오류에 대해 일선 의사들이 전적으로 책임지도록 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 필자가 아는 한 의사의 항변입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사람들이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돼 심지어는 동네 마트에서도 구입할 수 있는 해열진통제를 두고 생각해 보자.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거의 없다고 해서 의사의 처방 없이 사용하도록 한 그런 약제들도 임상에서는 수많은 부작용이 확인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약을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부작용을 따로 문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정교한 전문 교육을 받은 의사들(사실 의사를 지망생 개개인이 그런 교육을 얼마나 충실하게 받았고,또 실천하는 지는 별개로 봐야 하지만)의 실수는 이상하게도 치료술의 오류나 한계로 보지 않고 의사 개개인의 실수나 무능력, 부주의로 보려고만 한다. 그런 점이 문제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의료사고가 발생했을 때, 그 의료사고가 합리적으로 이미 예견된 오류에 포함되는 불가피한 것인지, 아니면 의사의 부주의나 무능에 의해 발생한 ‘사고’인지를 판별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일단 문제가 생기면 환자 측은 의사와 병원을 향해 핏대를 올리고, 의사와 병원은 그런 항의를 애써 외면합니다. 신해철법이 결국 폐기된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양 진영의 이런 시각과 논리는 간극을 좁히기가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누군가가 병에 걸리고, 그 병을 의사가 치료해야 하는 이상 피해 갈 수 없는 난제라고 봐야지요.
그러니 의사단체가 이 법을 순순히 수용할 리가 없습니다. 냉정하게 보자면, 의료 단체의 거센 반발 때문에 법안이 통과되지 못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실제로, 대한의사협회와 치과의사협회 등은 공동성명서를 통해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졸속 입법의 결과로 의료인의 방어진료를 확산시키는 등 안정적인 진료환경을 저해할 뿐 아니라 국민과 보건의료인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초래할 것이다.”
말인즉, 의료분쟁에 대한 의료기관의 조정 참여를 강제하면 의료기관과 의료인들은 ‘분쟁 발생 가능성이 있는 환자’에 대해서는 소극적·방어적으로 진료할 수밖에 없고, 이는 곧 환자들의 피해로 귀결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풍토에서는 조정신청의 남용이 불 보듯 뻔해 의료인과 의료기관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환자 측 입장을 대변하는 단체들의 주장도 거셉니다. “의료 자체가 가진 공공성을 감안하더라도 의료사고라고 의심될만 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환자는 당연히 의사와 의료기관에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물을 수 있어야 하고, 책임 소재를 가려 의료인이나 의료기관이 책임져야 할 부분은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 대목에서 신해철씨 사망과 관련해 불거진 문제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신해철씨 사망에는 해당 의료기관의 불법적인 의료행위가 상당 부분 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정 치료행위에 대한 환자의 동의 여부도 그렇고, 중대한 부작용이나 후유증이 발생했음에도 법과 규정이 정한 규칙이나 수칙을 정상적으로 준수, 이행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명백한 의료사고에 해당하지만 지금의 법체계나 관행으로는 신해철씨의 사망에 관련된 원인 제공자에게 합당한 배상을 요구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신해철씨의 경우 사망 자체가 사회문제화하는 바람에 그나마 실체가 규명됐다지만 그렇지 않은 갑남을녀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기도 합니다. 의료사고로 사람이 죽었는데, 왜 죽었는지, 죽었으니 어떻게 하겠다느니 등의 인과성 규명과 사후 조치가 없다면 삼척동자도 의아해 할 일이지요. 이런 까닭에 백혈병환우회·선천성심장병환우회·신장암환우회·GIST환우회·다발성골수종환우회 등 환자단체들은 “신해철법을 반드시 통과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고요.
환자 측 목소리를 조금만 더 들어볼까요. 한국환자단체연합회 관계자는 “의료사고 피해자 중에는 고액의 소송비를 부담할 능력이 되지 않아 의료사고 개연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송을 포기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면서 “이 경우 상당수 피해자들이 의료분쟁조정중재원을 찾지만, 의료기관이 동의하지 않아 조정이 성립되지 않으면 형사사건화 외에는 다른 방법을 취할 수가 없게 됩니다. ‘울화통이 터질 일’이라며 병원 앞에서 시위를 하다가 업무방해죄 등으로 경찰서를 들락거리는 일도 드물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정부는 2012년부터 의료분쟁조정제도를 도입·시행하고 있지만, 해당 의료기관이 조정을 거부하거나 일정 기간(14일) 내에 필요한 답변을 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사안 자체가 각하되는 규정 때문에 사실상 실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환자 측 하소연입니다.
실제로, 분쟁조정이 시작된 2012년 4월부터 2015년 말까지 중재원에는 모두 5487건의 분쟁조정건이 접수됐지만 이 중 조정이 개시된 것은 43.2%인 2342건에 불과합니다. 조정이 개시되어 중재가 성립되는 비율이 94%로 비교적 높다는 점을 감안할 때 어떻게든 조정만 시작되면 양측이 납득할 수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음에도 ‘조정의 불성립’이라는 ‘탈출구’를 만들어 시쳇말로 ‘죽도 밥도 아닌’ 제도가 되고 만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멀쩡한 사람이 치료를 받다가 죽었는데, 묻고 따질 수도 없습니다. 정부가 나서 명쾌한 규정을 만들거나 하다 못해 지침이라도 내놔야 하지만, 고작 한다는 게 어정쩡한 분쟁조정제도 정도니 환자 측은 그들대로 “정부는 무엇하고 있느냐”고 핏대를 올리고, 의료기관들은 “그럼 의료 포기하자는 것이냐”고 맞서 도대체 협상과 타협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국회와 보건복지부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제 19대 국회가 오는 4월 폐회되면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신해철법)도 자동 폐기됩니다. 환자단체에서는 “19대 국회가 다른 현안들은 총선 후에 차기 국회로 넘기더라도 ‘의료분쟁 조정절차 자동개시제도’만은 꼭 도입하는 입법적 결단”을 촉구했지만 이마저도 물 건너 가고 말았습니다. 환자단체들은 “의사단체의 주장처럼 의료분쟁 조정신청 남발이 우려된다면 최소한 법률적 판단이 가능한 ‘사망’이나 ‘중상해’의 경우로 그 범위를 제한해서라도 ‘의료분쟁 조정절차 자동개시제도’를 도입하라”고 절충적인 제안까지 했으나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이 정도라면 입법기관인 국회와 정부 부처인 보건복지부가 직무를 태만히 한 잘못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감한 사회적 논쟁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은 전형적인 관료주의의 속성입니다. 그런 속성 자체를 오로지 비난만 할 일은 아닌게, 이 경우 어떤 결정을 하든 상당한 분란의 여지가 없지 않고, 어떤 선택을 하든 책임이 따르니 누구라도 그 부담을 떠안으려고 하지 않을 것임은 자명하니까요.
하지만, 결론이 무엇이든 국회와 복지부는 조정 노력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확고한 입장을 정하고 이해 당사자들을 설득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접근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설득하는 일이야말로 많은 권한을 위임하고, 꼬박꼬박 세금을 내는 국민에 대한 도리이니까요.
당연한 말이지만, 환자든 의료인이든 모두 국민입니다. 그러니 편들 것 없이 성의껏 필요한 노력을 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결과가 어떻든 납득은 하지 않았겠습니까. ‘납득할 수 없는 불만’을 가진 것과 ‘불만이지만 납득은 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 다른 상황이니까요.
그런데 국회나 복지부가 일하는 모양을 지켜보면 ‘납득할 수 없는 불만’을 키우고 있습니다.
특히나, 국회에는 더 이상 기대를 걸기 어렵게 됐습니다. 이미 물리적인 시간도 없고, 차기 국회에서 이 법안을 발의하려면 다시 절차를 밟아야 하니까요. 국회의원이라는 직분의 한계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선거를 거쳐야 하는 국회의원들은 가능한 결속이 공고한 단체들과 대립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국회의원들에게 다시 법안 상정을 기대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됩니다.
그러니 보건복지부가 나서야 합니다. 복지부가 양측의 의견을 듣고 조정작업을 거쳐 개정안을 내는 것이 가장 합리적일 것입니다. 사안 자체가 복지부 소관이기도 하고, 이걸 국회에 맡길 경우 조정 절차를 소홀히 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불합리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복지부는 양측의 주장이 너무 극단적으로 맞서 조정의 여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더더욱 복지부가 팔을 걷어부쳐야 합니다. 그렇게 첨예하게 이해가 엇갈린 사안을 양측의 문제라며 불구경 하듯 멀찍이 떼어놓고 수수방관한다면 편함을 얻는 대신 신뢰를 잃을 게 뻔하니까요.
앞서 언급한 ‘조정’은 바꿔 말하자면 ‘최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사안의 경우 조정이 쉽지 않겠지만, 양측의 주장을 최대한 반영한다면, 그래서 의사집단이 환영은 못해도 납득은 하고, 환자 측도 성에 차지는 않지만 수긍은 하도록 하면 됩니다.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고, 감당해야 하는 곳이 바로 보건복지부입니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의사단체의 명패 뒤에 숨어 사특하게 돈만 긁어모으는 함량 미달의 불량 의사들이 의외로 많다는 거 의사들도 알지 않습니까. 또, 병원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선후도 가리지 않고 목청부터 높이고, 그걸 빌미로 뭐 좀 얻어보겠다고 용을 쓰는 진상 환자들도 정말 많습니다.
따라서 이런 문제, 즉 어느 쪽이든 악용의 여지만 극소화한다면 양식있는 의사, 상식적인 환자들이 그걸 반대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환자들 쪽에서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하는 것보다는 일부라도 얻는 게 낫고, 그걸 마중물 삼아 장기적으로 보다 진전된 결과를 도모할 수도 있으니까요.
의사 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변해 한번 봇물이 넘치기 시작했는데, 그걸 없는 일로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진료행위가 크게 위축될 수준이 아니라면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게 세상의 변화에 조응하는 방법이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한꺼번에 모든 것을 내놔야 되는 상황을 맞을 수도 있고, 또 원한다고 모두 가질 수는 없는 세상이니까요.
철옹성만 같은 불합리와 부조리라도 임계점에 다다르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변화의 양태를 돌이켜야 합니다. 신해철법은 이 지점에서 아직도 발화하고 있는 하나의 도화선입니다. 그런 점을 살펴서 열 걸음이 무리라고 판단되면, 두세 걸음이라도 내딛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특히나 의사든 환자든 국민을 상대로 ‘이기거나 아니면 지는 게임’을 한다는 생각을 갖지 말기 바랍니다. 거기에 승패는 없습니다. 다만, 설득을 했느냐, 못 했느냐의 문제가 있을 뿐입니다.
복지부가 뒷짐만 지고 있는 사이에 19대 국회가 은근슬쩍 유기해버린 신해철법, 그 분란의 심부를 들여다보면 승자는 없고, 상처만 남아 있습니다. 그 졸속한 대립의 흔적을 보면서 이 말을 상기합니다. ‘끝 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jesh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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