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통일] (24)셰벤 前 통독 방위사령관

[나와 통일] (24)셰벤 前 통독 방위사령관

입력 2011-07-12 00:00
업데이트 2011-07-12 01:36
  • 글씨 크기 조절
  • 프린트
  • 공유하기
  • 댓글
    14

“한반도 통일 때 북한군에 모욕감 줘선 안돼”

남북한이 통일된다면 한반도의 군대는 어떻게 될까. 이는 남북한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주변 강대국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민감한 문제다. 21년 전 통일을 이룬 독일 역시 같은 고민에 빠졌었다. 동독이 서독으로 흡수되는 형태에서 동독 인민군은 서독연방군 ‘분데스베어’로 축소, 통합됐고 이 과정에서 정신적, 심리적 혼란을 겪었다. 이 과정을 지켜본 ‘분데스베어’의 베르너 폰 셰벤 예비역 중장은 11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동독 군인들이 갖고 있었던 사상은 통일과정에서 ‘제2의 피부’처럼 벗겨 없어졌다.”면서 “한국에서의 상황이 독일처럼 전개될 경우 북한이 굴욕감이나 공감대 부족을 느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는 통일부와 베를린 자유대의 ‘독일의 통일·통합정책연구’ 내용을 바탕으로 셰벤과 이메일을 통해 이뤄졌다.

→동·서독 군대 통합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해 달라.
이미지 확대
베르너 폰 셰벤 前통독 방위사령관
베르너 폰 셰벤 前통독 방위사령관


-1990년 3월 18일 동독에서 민주정부 구성을 위한 선거가 있었고, 7월 1일 동·서독의 경제·금융 통합을 위한 협의가 있었다. 군 통합까지는 동·서독과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등 4개 신탁국가 간의 2+4 협상이 있었다. 이 협상에서 서독 46만명, 동독 17만명을 통합해 독일연방군 ‘분데스베어’의 병력을 총 37만명으로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동독의 인민군은 서독의 군복을 입고 ‘분데스베어’의 지휘를 받게 됐다. 계속 군 복무를 할 것인지, 제대를 할 것인지는 철저하게 개인의 결정에 맡겼다. 이 과정에서 특별한 계획이나 청사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모든 과정은 개별적 사안으로서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결정에 의해 이뤄졌다. 동독 인민군 해체 작업은 부대에 따라서 3개월에서 최대 2년까지 소요됐다.

→1990년 10월 3일 ‘통일의 날’을 기억하나.

-‘통일의 날’ 이틀 전인 10월 1일 동독이 바르샤바 조약에서 탈퇴했고, 2일에는 동독 인민군이 해체됐다. ‘통일의 날’에는 동독군의 모든 주둔지와 병영에 독일 연방공화국의 국기가 게양됐다. 독일 전국에서 통일을 자축하는 축제가 열렸지만, 동·서독 군 통합 행사가 열렸던 슈트라우스베르크의 거리에서는 불빛이 보이지 않았다. (동독) 군인들의 가슴 속에는 자신과 가족의 미래에 대해 매우 심각한 불안감을 갖고 있었다.

→군 통합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가장 큰 걸림돌은 동독 군인들의 경직된 복종체계였다. 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전반적으로 동독군들의 지휘체계에는 진취성이나 유연성이 부족했다. 5만명에 이르는 동독의 직업군인들은 4년 안에 동독 군의 남은 잔재를 없애는 임무에 충실히 협조하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적으로 여겨 왔던 서독군에 입대해야 한다는 사실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서독 군인들은 동독 장교들 사이에서 있을지도 모르는 모욕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들은 “독일인으로서 독일인에게”라는 원칙을 갖고 동독군에 다가갔으며, 지휘부 접수는 우호적으로 이뤄졌다. 결과적으로 시민사회와 동맹군으로부터 인정받고 존경받았다.

이미지 확대
1991년 3월 브란덴부르크 뷘스도르프의 동독지역 주둔 소련군사령부를 방문, 버칼로(왼쪽) 소련군 연대장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베르너 폰 셰벤 장군.
1991년 3월 브란덴부르크 뷘스도르프의 동독지역 주둔 소련군사령부를 방문, 버칼로(왼쪽) 소련군 연대장과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베르너 폰 셰벤 장군.


→통일 후 ‘분데스베어’의 역할과 위상에 차이가 있다면.

-냉전시대의 종식은 ‘분데스베어’의 역할과 임무를 10년 안에 바꿔 놓았다. ‘분데스베어’는 국토방어 임무와 함께 세계평화 유지군으로 변모했고 나토(NATO)군의 강력한 회원국으로 편입됐다. 만일 독일이 통일되지 않았다면 유럽이 어떻게 통합됐겠는가. 독일인들은 40년간 서로 떨어져 살았고, 서로 다른 두 군사문화가 한 영토에 존재했다. 구 서독에서는 서유럽과 북대서양의 정체성이 자라난 반면, 구 동독지역에서는 또 다른 정체성이 성장해 왔다.

→한반도 상황에 빗대어 본다면.

-한반도의 상황은 독일에서 일어났던 과정과는 상당히 다른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먼저 국민들이 오랜 분단 뒤에 하나가 되기 위한 굳은 의지를 보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는 관련국의 통일을 위한 정치적 행보에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둘째, 관련 당사국들 간의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 물론 당사국들은 상황이 ‘윈·윈’이라고 여겨질 때 정치적 합의를 시도하게 될 것이다. 셋째, 군 핵심간부(엘리트)들은 정치적 합의를 따라야 한다. 이는 정치적 합의가 국가와 가족의 미래에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고 판단될 때 이뤄질 것이다.

→동·서독군의 ‘이념의 골’이 깊었을 텐데.

-나는 동독 출신 군인들에게 주입된 사상이 마치 ‘제2의 피부’처럼 벗겨 없어지고, 책임감 있는 군인의 모습이 나타나는 과정을 지켜봤다. 북한군에 주입된 사상은 동독의 경우보다 더 큰 작용을 하겠지만 남한에서는 ‘이데올로기적 포장’ 혹은 가면 뒤에 숨겨진 인격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섬세하게 접근해야 할 것이다. 향후 한국에서의 상황이 독일처럼 전개될 경우, 체제의 붕괴라는 어려움 외에 굴욕 혹은 공감대 부족이라는 추가적 어려움이 더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천안함·연평도 사건 등 북한의 도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공격과 같이 일방적인 적대적인 행위는 평화협상을 지연시킨다. 이 문제는 남북한과 중국, 미국 정부 간의 협상 의제로 다뤄져야 한다. 북대서양에서 일어난 핵 충돌의 역사를 보면 강대국 간의 시행착오로 인해 발생한 충돌을 조용히 해결한 여러 예시를 찾을 수 있다.

→남북한 정부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북한은 현실 세계에 대한 인식을 더욱 넓힐 수 있도록 인도돼야 하며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고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될 수 있도록 안내돼야 한다. 남한은 남북한 국민 모두가 한 국가의 일원이라는 인식과 비전을 가져야 할 것이다.

정리 윤설영기자 snow0@seoul.co.kr

●셰벤 예비역 중장

1990년 독일 통일 당시 동독 인민군의 일부를 통합하기 위해 창설된 동부연방군 사령부 부사령관을 거쳐 1991년 4월부터 1994년 9월까지 동부지역 방위사령부 및 군단 사령관을 맡았다. 중장으로 예편한 뒤 2002년부터 2009년까지 ADAC(독일자동차클럽) 부회장을 지냈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한국국방연구원(KIDA)에서 명예연구원을 지내기도 한 셰벤은 ‘독일 통일 과정과 한국에의 교훈’이라는 프로젝트의 자문위원회에도 참여했다.
2011-07-12 6면
많이 본 뉴스
성심당 임대료 갈등, 당신의 생각은?
전국 3대 빵집 중 하나이자 대전 명물로 꼽히는 ‘성심당’의 임대료 논란이 뜨겁습니다. 성심당은 월 매출의 4%인 1억원의 월 임대료를 내왔는데, 코레일유통은 규정에 따라 월 매출의 17%인 4억 4000만원을 임대료로 책정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입니다. 성심당 측은 임대료 인상이 너무 과도하다고 맞섰고, 코레일유통은 전국 기차역 내 상업시설을 관리하는 공공기관으로 성심당에만 특혜를 줄 순 없다는 입장입니다. 임대료 갈등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규정에 따라 임대료를 인상해야 한다
현재의 임대료 1억원을 유지해야 한다
협의로 적정 임대료를 도출해야 한다
모르겠다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