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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움에 비타민 음료수 건네려다…보건소서 무안당한 시골노인

고마움에 비타민 음료수 건네려다…보건소서 무안당한 시골노인

입력 2016-10-09 15:37
업데이트 2016-10-0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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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 온 이장·공무원 따로 식사…“좋지만, 시골인심 삭막”

충북 옥천군 군북면에 사는 임계호(85) 할아버지는 매월 한 차례 옆 마을에 있는 보건지소를 찾는다. 지병인 고혈압과 당뇨 상태를 체크하고, 한 달 동안 먹을 약도 받기 위해서다.

그는 그곳에 갈 때마다 자신을 반겨주는 직원들이 고맙다. 한 달 전에도 “무더위에 건강 잘 챙기라”면서 차가운 얼음 녹차까지 대접하는 모습에 가슴이 훈훈해졌다.

언제나 받기만 하는 게 마음에 걸렸던 그는 이달 초 약을 받으러 가면서 큰 맘 먹고 1만원짜리 비타민 음료를 한 박스 샀다.

손녀뻘 되는 직원들을 위해 고민 끝에 준비한 감사의 선물이다. 그러나 음료 상자를 전해주려던 그의 손은 금세 무안해졌다.

직원들이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문제 삼아 한사코 받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임 할아버지는 승강이 끝에 하는 수 없이 가져갔던 음료를 다시 들고 나왔다. 아무리 호의라고 해도, 상대가 부담스러워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도 김영란법의 취지를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할아버지뻘 되는 촌로의 순수한 성의까지 받아주지 않는 건 심하다는 생각을 지을 수 없었다.

그는 “그동안 보건지소에서 얻어 마신 음료만 해도 내가 들고간 것보다 많다”며 “좋은 취지는 이해하지만 시골 늙은이의 고마운 마음을 전할 수 없게 하는 건 너무한 것 아니냐”고 푸념했다.

김영란법 시행으로 사회 전반에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접대가 사라지면서 저녁 약속이나 술자리가 눈에 띄게 줄고, 경조사도 검소해졌다.

허용·금지의 범위가 명쾌하게 제시되지 않아 적용 대상인 공직자들은 너도나도 시범 케이스에 걸리지 않으려고 몸을 사리는 분위기다.

깨끗한 사회로 가는 과정으로 평가되지만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정(情)에 의존해왔던 오랜 관습으로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여전히 낯설고 어색한 것이 사실이다.

지역사회에서도 인맥이나 유대가 강한 농촌에서는 그 변화의 충격파가 더욱 크다.

보은군청 예산부서는 최근 동료들에게 “예산 설명을 위해 찾아올 때 음료수를 가져오지 말라”는 글을 내부 전산망에 올렸다.

김영란법은 공직사회 안에서도 인사·감사·예산·평가 기간에는 직무 관련성을 들어 식사 제공 등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예산 담당 공무원은 “직원끼리 정을 나누는 차원에서 사무실을 방문할 때 음료수나 간식을 사오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오해를 부를 수 있어 미리 양해를 구한 것”이라며 “논란의 소지가 있으면 무조건 차단하는 게 요즘 추세”라고 변화된 공직 분위기를 전했다.

지난 5일 이장단회의가 열린 옥천군 이원면에서는 회의 뒤 이장과 면사무소 직원들이 따로 식사하는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이 지역 이장들은 한 달에 한 번꼴로 면사무소에 모여 회의를 한다. 군정 현안을 설명 듣고 건의사항 등을 내놓는 자리인데, 당연히 면장 등 공무원이 배석하고, 회의 뒤에는 자연스럽게 식사자리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공창식 이장단협의회장은 “회의가 끝나면 으레 국밥이나 칼국수 한 그릇 하는 자리가 마련되는데, 면 직원들이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아 식사는 우리끼리 했다”며 “평소 호형호제하는 사이인데, 갑자기 삭막해진 분위기가 적응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골 면사무소는 사랑방이나 다름없다.

주민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복지서비스를 요청하고, 불편을 하소연한다.

감자·고구마 등 수확한 농산물을 들고 와 맛을 보이거나, 심지어 떡이나 부침개를 싸다 주기도 한다.

강호연 이원면장은 “김영란법 시행 이후 직원 스스로 외부인 접촉을 꺼리기도 하지만, 주민들도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면사무소 방문을 자제하는 분위기”라며 “면사무소 중심의 지역사회 네트워크가 하루가 다르게 무뎌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영란법에 저촉되지 않을 것 같지만 자칫 법을 위반했다는 구설에 오를까 걱정이 돼 서로 만나는 것을 꺼릴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일상적인 직무수행이라면 너무 경직될 필요는 없다는 게 감사 부서의 해석이다.

옥천군청 기획감사실 관계자는 “직무 연관성 없이 식사 정도는 문제될 게 없고, 원활한 직무수행을 위해 3만원 이하의 식사는 허용이 된다”며 “다만 아직 구체적인 판례 등이 없는 상태여서 경계가 모호한 탓에 직원들이 알단 피하려고 하고, 우리도 명쾌한 지침을 주지 못해 안타깝다”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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