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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범죄자’로 산 프로파일러…“이젠 ‘나’로 살고 싶다”

평생 ‘범죄자’로 산 프로파일러…“이젠 ‘나’로 살고 싶다”

입력 2017-04-17 11:08
업데이트 2017-04-17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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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말 명예퇴직하는 ‘경찰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 경감

유영철·정남규·강호순 등 흉악범 다수 면담…“프로파일러 된 것 숙명”

“생각해보니 참 오랜 세월을 ‘범죄자’로 살았네요. 이제는 정말 ‘나’로 살고 싶습니다.”

권일용 경감(경찰청 범죄행동분석팀장)은 직업 특성상 늘 ‘범죄자의 마음’으로 살아야 했던 경찰관이다. 범죄자의 내면을 파고들어 마음을 읽고, 입을 열게 하는 일이 그의 업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프로파일러(범죄심리분석관)라 부른다. 그의 노력은 우리 경찰의 범죄심리 분석 수준을 끌어올렸고, 그의 활동은 이 분야의 ‘살아있는 역사’가 됐다.

‘한국 1호’ 경찰 프로파일러인 권 경감은 이달 말 명예퇴직과 함께 경찰을 떠난다. 1989년 8월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해 일선 형사와 현장 감식요원을 거쳐 프로파일러까지 27년 8개월을 보내는 동안 어느새 머리는 희끗희끗해졌다.

17일 만난 권 경감은 올해 나이를 묻자 “나이는 공개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그간 언론 등을 통해 얼굴과 신상이 꽤 알려진 터라 범죄자들이 집 근처로 찾아와 해코지하려 드는 경우가 몇 차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형사로 평생 근무해도 살인사건을 직접 수사할 기회는 많아야 20∼30번이다. 권 경감이 지금까지 면담한 범죄자는 줄잡아 900명이 넘는다.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 등 연쇄살인범을 포함해 살인사건 피의자가 대부분이다.

그가 처음부터 프로파일러 등 과학수사 전문가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군대에 갔다가 “공무원 시험이나 한번 보라”는 아버지의 권유로 전역 후 경찰 임용시험을 치러 ‘덜컥’ 합격했다.

서울시경(현 서울지방경찰청) 형사기동대에 배치된 그는 ‘범죄와의 전쟁’에 투입돼 강·절도, 폭력, 마약, 인신매매 사건을 수사했다. 이후 1993년 서울 동부경찰서(현 광진서)에 발령되면서 과학수사라는 영역을 처음 마주했다.

“당시 감식담당이 발령 나 공석이었어요. 제가 막내여서 떠맡게 됐죠. 서울청에서 2주간 교육을 받았는데, 왠지 이 일을 한번 붙들고 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던 것 같아요.”

현장에서 본 창틀과 같은 재질의 목재를 사다 혼자 지문 채취를 연습할 정도로 노력하다 보니 어느새 ‘지문의 달인’이 됐다. 피나는 노력 덕분에 가는 현장마다 신기하게도 지문이 잘 나와 감식요원으로는 흔하지 않은 특진까지 했다.

2000년 2월, 또 한 차례 전환점이 찾아왔다. 범죄심리 분석 전문가 양성을 추진하던 윤외출 당시 서울청 감식계장(현 경무관)이 그의 남다른 ‘현장 경험’을 눈여겨보고 서울청으로 끌어왔다. ‘경찰 1호 프로파일러’는 그렇게 탄생했다.

서울 전역이라는 큰 무대에서 뛸 기회를 얻은 권 경감은 처음에는 기대가 컸다. 그러나 경찰 조직에 프로파일링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무하던 때라 사실상 ‘맨땅에 헤딩’ 수준이었다. 혼란스러운 시간이 한동안 이어졌다.

“좋다고 갔는데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범죄분석 전문가들과 범죄자 면담을 다녔습니다. 범죄분석 항목을 만들어 1960년 이후 발생한 살인사건 800건의 범행 특성도 분석했죠.”

이런 노력을 계속하다 보니 현장에 나타난 범행 양상과 용의자 특성을 연결짓는 ‘패턴’이 눈에 잡혔다. 검거 전에는 용의자 특성을 찾아내 수사 범위를 좁히고, 검거 후에는 범인 입을 열어 자백을 받는 데 이런 패턴은 주효했다.

2002년 유영철, 2004년 정남규, 2007년 강호순, 2010년 김길태를 포함해 2000년대 이후 사회를 충격에 몰아넣은 흉악범들은 대부분 그를 거쳤다.

특히 서울 서남부 지역에서 13명을 살해한 사이코패스(반사회성 인격장애) 연쇄살인범 정남규는 권 경감에게 잊을 수 없는 대상이다. 자신에게 경위 특진을 안긴 정남규를 가리켜 그는 ‘악의 끝’, ‘괴물’이라고 했다.

“정남규는 등 뒤에서 피해자를 찌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피해자들의 고통을 보려고 반드시 돌려세운 뒤 찔렀죠. 검거된 뒤 면담 중 자신의 범행을 이야기할 때면 얼굴에 미소가 돌더군요. 그 현장으로 돌아간 거죠.”

프로파일러는 이런 범죄자의 탄탄한 심리적 방어기제를 뚫어야 한다. 자신이 단서를 찾아주길 기대하는 수사팀도 의식해야 한다. 수사 과정에서 만난 피해자의 처참한 모습은 연신 어른거린다. 정신적 중압감이 클 수밖에 없다.

“프로파일러 후배들이 들어온 뒤에는 사건이 끝나면 같이 모여 업무와 전혀 무관한 수다를 떠는 시간을 갖습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는 심리적 지지를 얻는 시간이죠. 그래도 중압감을 못 이겨 그만두는 후배들이 있습니다.”

17년여간 ‘범죄자의 마음’으로 살다 보니 그는 “번아웃(burnout, 소진)”된 느낌이라고 했다. 딸이 올해 23세가 되기까지 제대로 놀아준 기억도 없을 만큼 가족도 못 챙겼다. 아직 정년이 8년 남았지만, 결단을 내린 이유다.

“경찰을 그만두겠다고 하니 딸이 ‘잘 생각했어. 난 아빠 편이야’라고 하더군요. 딸도 아빠를 지켜보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모양이라 눈물이 났습니다. 너무 지치기도 했고, 가족과의 관계도 더 잃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권 경감은 자신을 의지해 온 프로파일러 후배들에게는 몹시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경찰 조직이 프로파일러를 대하는 방식은 개선될 필요가 있다며, 오랫동안 몸담은 조직을 향해 마지막 당부를 남겼다.

“프로파일러는 사건이 없더라도 범죄자를 면담해 자료를 계속 축적하고 연구합니다. 군 특수부대처럼 자신들이 꼭 필요한 상황이 생길 때를 늘 대비하고 있죠. 이런 업무의 성과를 양적으로만 평가하는 것은 정말 무의미한 일입니다.”

그는 또 “경찰이 프로파일러의 영역을 확대하려는 상황에서 인력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며 “방향은 맞지만, 새로 추가되는 영역의 업무를 기존 프로파일러에게 그대로 맡기기보다 해당 분야 인력을 충원하는 쪽이 옳다”고 말했다.

권 경감은 퇴직 후 계획을 묻자 “정말 없다”고 답했다. 그러나 과연 그 말대로 될지는 미지수다.

“지금은 정말 좀 쉬고 싶습니다. 그래도 평생 경찰관이던 사람이 옷 벗었다고 하루아침에 나 몰라라 할까요. 후배들이 도움을 구하거나 큰 사건이 발생했을 때 경찰에서 요청하면 기꺼이 힘을 보탤 겁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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