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모르는 게 문제/김진아 도쿄특파원

[특파원 칼럼] 모르는 게 문제/김진아 도쿄특파원

김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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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2-01-04 20:50
수정 2022-01-05 0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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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아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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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화를 이끈 분이잖아요.”

지난달 말 일본 지상파 방송의 한 예능 프로그램을 볼 때였다. 배경처럼 틀어 놨던 TV를 하던 일을 멈추고 보게 된 이유는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이 나와서였다. 전국 대학생 1만명이 꼽은 ‘막부, 메이지 시대 굉장했던 인물 베스트 25’ 설문조사를 보고 연예인들이 대학생의 최근 경향을 맞히는 퀴즈 프로그램이었는데 그 설문조사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4위를 기록했다. 앞서 그 대학생이 이토 히로부미를 메이지 시대 존경하는 인물로 꼽으면서 극찬하자 연예인들은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14위로 꼽힌 인물은 ‘요시다 쇼인’이었다. 요시다 쇼인은 이토 히로부미만큼 한국에서 유명하지 않지만 일본의 한국 침탈 원흉이 바로 그다. 요시다 쇼인은 일본 무사 정권인 막부 시절 요인 암살을 시도하다가 실패해 29세의 나이에 처형됐다. 그가 키운 제자 중 한 명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다. 요시다 쇼인이 일제강점기를 만든 인물이라고 하는 이유는 서구 열강이 아시아를 침략할 때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야 한다며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일본 프라임 시간대인 오후 8시쯤 많은 사람이 보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요시다 쇼인을 존경하는 인물이라며 방송한 것은 충격적이었다. 더 놀라웠던 것은 지성의 상징인 대학생들이 꼽은 존경하는 인물이 그들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이토 히로부미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태어난 나라에서는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공감했다. 이 간극에 대해 뭐라고 설명하는 것이 좋을까.

일본의 ‘과거 지우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일본 정부는 니가타현에 있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강제 노역 현장인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추천 후보로 선정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니가타현은 사도광산이 17세기 세계 최대 금 산출량을 자랑하며 금의 채취에서 정련까지 수작업으로 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광산이라며 극찬한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때 사도광산을 전쟁물자 확보를 위한 광산으로 활용했고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조선인 노무자를 대거 동원하며 월급조차 제대로 주지 않은 부정적인 과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하고 사도광산을 응원하는 이 모든 일들은 제대로 배우지 않는 데서 시작한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집계한 고등학교 2022학년도 교과서 수요에 따르면 우익 성향의 교과서는 거의 채택되지 않았다. 메이세이샤의 ‘우리들의 역사총합’은 A급 전범 도조 히데키 전 총리의 연설을 비판 없이 실었는데, 점유율은 0.5%로 가장 낮았다. 반면 일본군 위안부 동원 등을 비교적 제대로 기술한 야마카와 출판사의 교과서들은 합계 점유율이 41.7%로 나타났다. 그나마 양심적인 교과서의 점유율이 높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 점유율도 50%도 안 되는 데다 일본이 잘못한 부분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교과서가 훨씬 많다는 게 문제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지만 한일 관계 개선의 기미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그 근저에 역사 문제가 있음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에 대해 비판만 하기보다는 그들이 어떻게 하면 역사를 제대로 알게 할 수 있을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2022-01-0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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