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송원 기자 nuvo@seoul.co.kr
수용 29세/ 벽을 허무는 집주인
이리 30세/벽을 허무는 집주인의 친구
옥형(노파) 88세/벽이 허물어지는 집 아랫집 거주자
때
2017년 어느 가을
곳
수용의 집
무대
벽이 있다. 벽의 좁은 면이 관객을 향하고 있다. 벽을 가운데 두고 하수로 붉은 조명, 상수로는 햇살 같은 밝은 조명. 붉은 조명은 빌라 주민들이 삼삼오오 돈을 모아 만든 ‘특수학교 설립 반대’ 현수막의 붉은 천에 빛이 투과된 것이다.
무대 뒤쪽, 현관문이 벽과 같은 방향으로 있고 문과 이어지는 계단은 불투명한 박스와 닿는다. 박스는 사람 하나 충분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로 옥형의 집이다. 옥형은 수용의 집 아래층에 사는 노파이지만, 우리가 만드는 것이 무대이니만큼 상상력을 발휘하여 수용의 집보다 위에 있다고 약속하자.
공업용 마스크를 낀 수용 하수 등장. 낡은 후드와 트레이닝 바지 차림의 수용은 어딘가 무기력해 보이지만 분무기와 김장비닐을 든 손에는 비장함이 은근하게 뿜어져 나온다. 수용, 비닐을 바닥에 깐다. 아주 꼼꼼히.
그사이 이리, 상수 등장. 붉은 천을 허리와 목에 두르고 양손에 커다란 망치를 하나씩 끌고 온다. 옆이 트인 롱스커트 사이로 보이는 다리와 팔뚝의 타투들과 붉은 천, 망치의 조화는 길거리 행위 예술가를 연상시킨다.
이리 (붉은 방을 둘러보며 기운을 한껏 느껴본다) 느껴져. 느껴져, 느껴져! 느낌이 팍! 온다, 와.
수용 …
이리 딱이야, 딱. 아주 먹고 죽기 딱이야. (손을 까딱거리며 허공에서 술잔을 넘긴다) 뭐랄까, 아주 옥보단스러워.
수용 일조권을 침해받는 참혹한 현장이야. 전혀 옥보단스럽지 않아.
이리 하루만 빌려줘라. 네가 우리 집에 가서 자.
수용 얼마 줄 건데.
이리 얘 봐라. 무슨 돈을 달래. 서울 살더니 양아치 다 됐다.
수용 나 원래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이리 서울시장은 뿌듯하겠어. 서울시민이 이렇게 우정보다 돈이 먼저인 양아치라서.
수용 (가만히 생각에 빠져든다) 뿌듯하기보다는 머리 아프지 않을까. 네 말대로 서울에 살면 돈만 밝히는 양아치가 되면, 서울시민은 곧 양아치란 말인데. 이 많은 양아치들을 다 관리하려면 시장은 최고의 양아치가 해야겠네.
이리 하여튼. 또 이상하게 진지해지지. 으, 진지충. 헛소리는 됐고, 하루만 빌려줘.
수용 (마스크를 하나 주며) 네 룸메 코 골아서 싫어.
이리 오랜만에 나비랑 오붓하게 시간 좀 보내 보자.
수용 나비?
이리 말 안 했나. 애인. 뉴 원.
수용 그새? 울고불고할 땐 언제고. 체력도 좋다.
이리 능력이 좋은 거지.
수용, 비닐을 다 깔고 일어서는데 비틀
이리 (곰곰이) 체력도 좋긴 해야겠다. 하여튼, 진짜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하루만 빌려줘. 어? 알겠지?
수용 너 오늘 우리 집에 왜 왔어?
이리 네가 오라며 새끼야.
수용 내가 왜 오라고 했어?
이리 하, 진짜 장난치나. (가만 돌이켜보다 손에 망치를 보고) 아… 벽…!
수용 그래, 오늘이면 옥보단도 안녕인데. 뭘 자꾸 빌려 달래.
수용, 마스크를 끼고 벽 앞에 선다.
이리 진짜 하게?
수용, 이리에게 마스크 하나를 주고 망치 하나를 받는다. 심호흡.
수용, 벽을 내리친다. 엄청난 진동과 소음 그리고 뿌옇게 이는 먼지.
삭막함이 감돈다. 수용, 다시 벽을 내리치려는데 이리 말린다.
이리 야, 잠깐만.
수용 왜?
이리 아니, 아랫집에서 올라오겠어. 진동이 장난 아닌데?
수용 아랫집만 올라 오냐. 엄청 커다란 직사각형 박스 하나에 벽을 댄 게 다인데. 다 쫓아오겠지.
이리 그냥 저번처럼 해. (몸에 두르고 있던 붉은 천을 흔들며) 두 번 했는데 세 번은 쉽지.
수용 세 번짼 수선비를 청구하겠대.
이리 얼만데, 얼마면 되는데. 누나가 해결해 줄게. 멀쩡한 벽을 허무는 것보다는 수선비가 낫지 않냐.
수용 빛 없이 사는 삶을 네가 알아? 숲세권 남향에 사는 네가 빛이 없어서 사람이 바싹바싹 말라가는 기분을 알 리가 없지. 머리랑 마음이 건조해지다 못해 바스러지는 기분이야.
이리 빛이 많아야 바싹바싹 마르지 없는데 왜 말라. 그냥 문을 열어 놓고 살던가.
수용 문이라는 건, 열고 닫으라고 있는 거야. 그게 문의 역할이지. 한 번 열면 언젠간 닫아야 제 역할을 다하는 거라고. 닫히지 않는 문은 문이 아니지. 그럴 바엔 없는 게 나아.
이리 그럼 창문을 만들자.
수용 (벽을 치며) 만들고 있잖아. 엄청 커다란. 창틀도 없고 유리판도 필요 없는 실용적인 창문.
이리 극단적인 놈.
수용 뭐든 확실한 게 좋잖아.
수용, 다시 벽을 허물기 시작
이리 어떻게 세상이 모 아니면 도, 흑 아니면 백으로 굴러가. 너 그거 강박이야. 괜히 바짝바짝 마르는 게 아니라고. 그래도 뭐 마른 장작이 잘 탄다더라.
(쿵)
수용 이렇게 살다 죽겠지 뭐.
이리 무모한 놈.
(쿵)
수용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나는 자살할 것 같아.
이리 또 데드타임! 웬일로 그냥 넘어가나 했다.
수용 데드타임?
이리 그래, 너 죽는다는 소리 하는 거.
수용 왜 사람들은 이름 짓길 좋아할까.
이리 언젠 병에 걸려 죽을 것 같다며.
수용 엄밀히 말하면 병이긴 하지. 내 죽음의 원인은 내 안에 우울이니까. 있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이 세상에 있대. 말이 돼?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세상을 그렇게 살아질 수가 있는 건가.
이리 오늘은 아니지?
수용 뭐가?
이리 데드타임.
수용 오늘은 벽을 허물어야지.
그때, 관리실 방송.
수용과 이리, 방송이 나오는 천장을 가만 본다.
방송 아아, 관리실에서 알려드립니다. 잠시 후 2시부터 특수학교 설립 반대 관련 7차 회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회의 후 시위가 바로 시작되니 참석을 희망하시는 모든 주민들은 2시, 아니 정정하겠습니다. 1시 50분까지 늦지 않게 관리실로….
수용 다 저기 가느라 벽이 무너지는지, 빌라가 무너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신경도 안 써. 그러니까 오늘 끝내야 돼.
수용, 다시 망치질을 시작하고
이리, 소음과 먼지 속에서 분무기로 물을 뿌려 먼지를 잠재운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이리, 수용의 얼굴에 물을 뿌린다.
수용 야!
이리 바싹바싹 마른다길래.
그때, 무대에 노파 등장. 노파가 있는 곳은 수용과 이리가 있는 공간과 다른 공간.
지팡이를 짚고 느린 걸음으로 나오는 노파는 명절에 자식이 사준 듯한 빳빳한 꽃무늬 재킷에 펑퍼짐한 배바지를 입고 낡은 크로스백을 맨 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무대를 둘러 계단으로 향한다.
이리 (창밖을 보다) 야, 근데 저기에 아랫집 할머니는 없는 것 같다?
수용 네가 아랫집을 알아?
이리 오다가다 몇 번. 그 할머니가 좀 인상적이잖아. 정제되지 않은 순수함이 있다고 해야 되나? 직설적이면서 약간 자기 방어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게 꽤 녹록지 않은 삶을 살았겠다 싶지. 괜히 과거를 상상하게 만들잖아.
수용 순수는 무슨. 그냥 괴팍한 할머니야. 아는 것도 없으면서 아는 척만 하는 딱 옛날 사람.
이리 와우. 노인 혐오야?
수용 무슨 내가 그런 몰상식한 사람이야? 이건 정당한 혐오야.
이리 (웃음이 터진다) 세상에 정당한 혐오도 있어?
수용, 상의를 걷어 올리자 시퍼런 멍이 배에 크게 있다.
이리 그래, 언젠가 너 맞을 것 같더라.
수용 야.
이리 누구야, 누가 이랬어. 남의 집 귀한 자식을…. 왜 맞고 다니냐 너는, 속상하게.
수용 정제되지 않은 순수함을 갖고 계신 분.
이리 할머니한테? 이게 할머니가 만든 멍이라고?
수용 어.
이리 역시 호기심을 자극한다니까. 아니 그렇잖아. 지팡이에 겨우 의지해서 걷는 할머니가… 또 네가 싹수없게 굴었지.
수용 내 싸가지도 가릴 건 가려.
이리 근데 진짜 왜 그런 건데?
수용 이름 석 자 부탁한 대가야.
이리, 한쪽에 놓인 빈 서명지를 들어 본다.
이리 자가인가?
수용 뭐?
이리 아니, 그 정도로 반대하는 거 보면. 강경한 표현이잖아.
수용 강경한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폭력적이지.
이리 너무 텅 비었다. 나라도 서명 해줄까? 학교 설립 찬성해.
수용 너는 우리 구민이 아니라서 소용없어.
빌라 주민들의 소란스러운 소리. 장애학교 반대 시위가 시작됐다.
이리 서명이라는 게 굉장히 순수한 방식이야. 동시에 직설적이기도 해. 굉장히 너답다.
수용 내가 순수하고 직설적이라고?
이리 나 이사 올까? 그럼 나도 지역구민 되잖아.
수용 됐어.
이리 나도 해본 말이다 뭐.
수용 불편과 불만을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행동을 해야 해소되는 건 맞지. 그게 옳은 방향이야. 하지만… 그 사람들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지만, 과연 옳은 방향인가 의문을 던질 수는 있잖아. 저 사람들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어떻게 확신하고 있는 거지. 저 확신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건데. 나는 그게 무지라고 생각해.
그사이, 노파 집 앞에 도착해 가방을 뒤지고
깜빡깜빡하는 현관 비밀번호를 적어 놓은 노트를 찾는다.
이옥형이라 커다랗게 적힌 노트를 꺼내는데 노트 사이에서 날이 시퍼런 과도가
뚝! 떨어진다.
떨어진 건 작은 과도지만 운석이 떨어진 듯한 소리와 진동이 무대를 흔든다.
수용과 이리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하고
잠시 사이.
노파가 과도를 주워 넣는 그사이, 무대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
노파 천천히 과도를 집어넣고 비밀번호를 확인하곤 집으로 들어간다.
밖에 소리가 무대를 환기하고
이리 (창밖을 보곤) 열정적이네. 그래도 생각해 보면 너무 비난만 할 수 없는 문제이긴 해. (수용의 시선을 느끼고) 야, 레이저 나오겠다. 분명히 말하는데 옹호하는 거 아니야. 그냥 공감능력을 지닌 인간으로서 감정이입을 해보자는 거지. 사실 그렇잖아. 누가 좋아해, 동네에 특수학교가 들어서면 집값이 떨어진다는 말도 있고.
수용 부동산이 떨어진다는 실질적인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집값이 떨어진다는 가설은 무지에서 시작된 삐뚤어진 믿음이야.
수용, 망치질을 시작한다.
이리 그래 좋아, 뭐가 됐든. 그 믿음이 아틀라스처럼 세상을 지탱하고 있잖아. 저 자리가 원래 학교 부지란 이유 말고 다른 이유는 뭔데. 학군 빵빵한 동네가 지하철로 네 정거장만 가면 되잖아. 그렇게 멀지도 않아. 공사부지 맞은편은 곱창에 포차, 막걸리 온갖 술집이 줄 서 있더만. 워싱턴 노래방 간판이 애들 하굣길을 밝혀 주겠지. 이 동네보다는 그 동네가 백 번 나아. 안 그래?
수용 ….
이리 기시감 들지 않아?
수용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리 한국전쟁 이후 국가적으로 밀고 있는 꽤 전통적인 방식인데. 그놈의 낙수효과야말로 삐뚤어진 믿음 아니야? 이게 진짜 먹힐 거라고 생각하는 뿌리 깊은 믿음. 네 말대로 무지에서 비롯된 거지. 될 놈만 건지고 나머지는 버리겠다는 걸 그럴듯하게 이름 붙여서 포장을 해요. 항상 그럴듯해 보이는 게 사람 눈 돌아가게 만들잖아. 난 그놈의 낙수효과가 대한민국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해.
수용 가부장제의 근본이라 생각하기도 하고.
이리 야 너. 짜식, 평소에 내 말을 아주 허투루 듣는 건 아니었구나.
수용 그럼. 귀는 문이 아니잖아. 닫히질 않아.
이리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수용 가끔은 닫혔으면 좋겠지만….
이리 삐뚤어진 세상을 바로잡는 건 중요해. 근데 이 망할 놈의 세상은 밑 빠진 독이라서 어딘가는 새게 되어 있잖아.
수용 왜 날 봐. 계속해.
이리 성장이 제1의 명분이 되는 시대는 흘러가고 있어. 이젠 희생의 이유도 살펴봐야 할 때가 왔다는 거지. 최소한의 납득과 보상은 있어야 한다는 말이야.
수용 애들만으로는 부족한 거야?
이리 뭐가?
수용 아이들이 배울 곳이 필요하다. 이걸로는 최소한의 납득과 보상으로 부족해?
이리 무엇보다 중요하지
수용 꼭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더라도 인류애적인 충만함을, 정신적인 보상을 얻을 수도 있어. 안 그래?
이리 ….
수용 왜 아무 말도 안 해?
이리 것도 능력이야. 한 번에 양쪽을.
수용 양쪽을 뭐.
이리 아냐.
(쿵)
이리 하여튼 지금은 어떤 이유도 저 사람들한텐 먹히지 않을 수도 있어.
(쿵)
이리 (밖을 보며) 한껏 쫄아 있으니까. 나는 저 사람들의 확신이 무지에서 나온 게 아니라 이번에도 버려질 거란 공포에서 나왔다고 봐.
(쿵)
수용 시끄럽지?
수용, 음악을 튼다.
life is killing - type O negative
수용 소음에는 락이지.
소음은 음악소리에 묻히고 뿌연 먼지 사이로 둘, 망치질.
벽을 타고 온 진동이 노파의 아크릴 박스를 사정없이 흔든다.
노파, 공포에 질린 비명이 락에 묻히고
노파의 사정과는 별개로 망치질을 하는 수용과 이리의 모습은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등록금 인상에 반대 시위를 하는 프랑스 청년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기도 하고 어느 삭막한 공사장의 인부 같아 보이기도 하다.
일순간 음악이 멈추고 노파가 있는 불투명 박스에 조명
노파 아주 발광을 허네!
수용, 노래를 멈춘다.
이리 왜?
수용 뭐라고 하지 않았어?
이리 아니.
수용 (귀를 파며) 아닌가.
이리 살살해, 스윙에 감정이 실렸다. 누구 생각해?
수용 여럿 (쾅) 생각하지.
이리, 분무기로 먼지를 잠재운다.
수용 사람들이 타격감에서 스트레스를 푼다고 하잖아. 복싱이나 야구공 치는 것처럼. 아무래도 난 때리고 (쾅) 던지고 (쾅) 치고 박으면서 (쾅) 스트레스 푸는 거엔, 적합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수용, 손목을 턴다.
이리 (덥다. 옷을 펄럭) 너도 참, 손목 아프단 말을 장황하게 한다.
수용 (보곤) 옷 빌려줄까?
이리 아니, 됐어.
수용 먼지 엄청 붙었네.
이리 블랙이 적나라하지.
수용 하나 가져다줄게.
이리 아냐, 됐어.
수용 아냐 가져다줄게.
이리 아니 괜찮아.
수용 불편해 보여. 가져다줄게.
이리 진짜 괜찮다고.
수용 나도 진짜 괜찮아.
이리 아니. 괜찮다니까?
수용 왜 화를 내.
이리 화를 낸 게 아니라. 됐다고 했는데 못 알아들으니까. 크게 얘기 해준 거지.
수용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이리 남자들 종족 특성이야? 왜 노를 못 알아듣지? 강요하지 마.
수용 내가 언제 강요를 했다고 그래.
이리 방금.
수용 그냥 물어본 거잖아. 불편해 보이니까.
이리 필요 없다고 분명히 말했잖아. 일곱 번째로 말해줄게. 됐어. 필요 없어. 난 이 옷이 좋아. 불편하든 더러워지든 이미 나랑 한몸이라고. 네가 신경 쓸 거 아니란 거지. 알겠어?
수용 그래. 그럼.
이리, 망치질
이리 넌. 매사에 모든 걸 통제해야 속이 시원해? 왜 그래?
(쾅)
이리 무지에서 나온 삐뚤어진 믿음? 웃기네. 야, 이름 짓기 좋아하는 건 나보다 네가 더해.
벽을 마구 치며 쏟아낼 대로 쏟아낸 이리, 숨을 고르고 이내 머쓱해진다.
수용 ….
이리 야. 미안하다.
수용 ….
이리 미안하다고.
수용 어.
이리 된 거지?
수용 ….
이리 미안해. 너도 알잖아. 내가 한 번씩 예민해지는 거.
수용 한 번씩이 아니잖아. 항상 예민해.
이리 항상은 아니지.
수용 맞아. 그리고 네가 알아둬야 할 게 있는데, 나도 너 못지않게 예민해. 난 화장실에 앉아서도 생각하는 걸 멈출 수 없어. 잘 때도 먹을 때도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서 미쳐버릴 것 같아. 어쩌면 이미 미쳐버린 걸지도 모르지. 차라리 미쳐버렸으면 좋겠다 싶어. 그게 더 확실하잖아. 어중간하게 미쳐 있는 것보단 명백한 환자가 되는 게 낫지.
이리 무슨 그런 말이 있냐.
수용 나는 그렇다고. 정상도 아니고 비정상도 아닌 경계에 서서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은 기분을 네가 알아?
이리 알지. 내가 여자 좋아하는 걸 알았을 때 그랬지.
수용 … 말이 나와서 말인데. 어머니한테 커밍아웃 언제 할 거야?
이리 갑자기 그 말이 왜 나와? 확실한 건 네 인생만,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수용 말이 나올 만하니까 하는 거야. 성 서방 밥은 잘 먹고 다녀? 불쑥불쑥 연락 올 때마다 무시도 못하고 답장도 못하고 얼마나 난감한 줄 알아? 3년이야. 이사 도와준 대가가 이렇게 부담스럽고 죄책감 드는 건 줄 알았음 도와 달라고도 안 했지. 커밍아웃을 하느냐 마느냐는 네 선택이지만 나까지 죄책감 들게 만들지는 말아 주라.
이리 … 말을 하지 그랬냐. 둘 다 입 꾹 다물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수용 나는 그렇다 쳐도 너희 어머니는 아니었을걸. 네가 보기에 내가 무모하고 강박적으로 보이겠지만 내가 볼 때 넌 무책임하게 도망만 다니는 걸로 보여. 시간은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아. 그냥 유예시킬 뿐이지. 편한 선택은 그만할 때도 됐잖아?
이리 내가 편하게 사는 것 같아?
수용 최소한 네 멋대로 사는 걸로는 보여.
이리 진짜 멋대로 사는 게 누군데. 세상이 어떻게 모 아니면 도로 돌아가. 불가능한 걸 바라면서 이게 왜 불가능하지 왜 이렇게 안 되지, 사람들이 왜 서명을 안 해 주지. 하루라도 징징거리는 걸 멈추고 저 사람들이 왜 저러는지 궁금해하긴 해봤어? 아니지. 네가 생각할 때 저 사람들은 나쁜 사람이니까. 안 그래? 그렇게 결론지었잖아. 왜? 그게 쉽고 편하니까.
수용 그래! 맞아! 왜냐고? 누구나 배울 권리가 있으니까!
이리 정신적 보상 같은 소리하고 있네! 누가 아니래?
수용 아니라잖아! 그러니까 저러지.
수용과 이리 사이에 침묵이 잠시 흐른다.
이리 내 말 듣긴 했니?
수용 내 귀는 문이 아니니까.
이리 칸트도 너보단 융통성 있을 거야. 알지 칸트? 골방에 틀어박혀서 글만 쓰던 외톨이. 제발 사람 좀 만나. 글로 배우지 말고. 그러다가 너도 청혼 승낙만 7년 고민하는 수가 있어. 결혼해야 하는 이유 354가지,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350가지 쓰면서.
수용 … 내내 날 그렇게 생각했어?
이리 언제부터 내 생각이 중요했냐. 넌 너 이외의 사람들은 다 멍청하고 덜떨어졌다고 생각하잖아.
수용 내가 언제.
이리 자신을 한 번 돌아봐.
수용 … 그만 가주라.
이리 왜 도와 달라며. 아, 그래서 불렀니? 옛말에 무식한 놈이 힘세다고 이런 일엔 내가 나서야지.
수용 됐어, 가. 네 도움 필요 없어.
이리 정말?
수용 그래.
이리 후회 안 하지?
수용 그래! 정말 진짜로 필요 없어.
이리 그래 그럼!
이리, 돌아갈 채비 하는데 초인종 소리.
수용, 현관으로 가(계단의 문이 아닌 객석을 향해) 손님을 확인하는데
이리 간다
수용, 이리를 잡고 숨을 죽인다.
이리 왜?
문 두드리는 소리
이리 놔.
수용 (속삭이듯) 아랫집.
이리 이런 게 자승자박이란 거다.
이리, 문으로 향하고
수용 어디 가.
이리 가라며.
수용 할머니 가면 가.
이리 벽은 허물면서 저깟 문은 하나 못 여냐.
수용 그게 아니라. 손에 뭐가 있어.
이리 뭐?
수용 몰라. 뾰족하고 날카로운 걸 쥐고 있어. 송곳이나 드라이버 같아.
이리, 현관(객석을 향해)으로 가 보면
커다란 스크린에 할머니의 모습이 뜬다.
모니터로 보이는 노파는 인터폰 렌즈에 왜곡된 모습이다.
괴이하고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이리 진짜네….
수용 잘못하다간 오늘 피 보겠어.
이리 피는 무슨.
수용 말했잖아 전형적인 옛날 사람이라고.
이리 나도 난데 너 너무 고정관념으로 뚤뚤 뭉친 거 아니냐. 그냥 할머니야. 우리랑 똑같은 사람이라고.
수용 네가 안 맞아 봐서 그래!
이리 쫄았구만.
수용 … 얼마나 아픈데.
이리, 다시 현관으로 가 동태를 살피곤
이리 안 가시네….
수용 그냥 없는 척하자. 층간소음에 살인도 난다잖아.
이리 그 난리를 쳤는데 없는 척이 돼?
수용 해보고 말해. 왜 안 해보고 그래?
이리 넌 이상한 데서 긍정적이다?
수용 넌 남 일에만 용기를 내잖아.
이리 그래, 알겠어. 집주인 마음대로 해. 말 그대로 집주인이 주인이니까.
이리, 가방을 대충 던지곤 의자에 털썩 앉는다.
가만 보던 수용은 멀찍이 떨어진 바닥에 앉는다.
이리 왜 바닥에 앉아?
수용 왜.
이리 지금 눈치 주냐.
수용 그건 무슨 피해망상이야.
이리 네가 나중에 또 뭐라고 할까 봐 그러지. 불만 있을 땐 말 안 하고 한참 지나서 말하잖아.
수용 내가 쌓아 두는 게 아니라 네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거지.
이리 실수가 실순지 어떻게 알아, 말을 안 하는데.
수용 어떻게 몰라?
이리 넌 아니?
수용 당연하지. 내가 네 입장이었으면.
이리 그런 가정은 하지 말자. 넌 내가 아니잖아. 나도 네가 아니고.
수용 상식에 대한 얘기야.
이리 이젠 내가 상식도 없다?
수용 (난감하지만 거짓말을 할 순 없지) 가끔.
이리 너한테 난 대체 뭐냐?
수용 친구.
이리 원래 친구한테 이래? 아님 나한테만 이래?
수용 내가 뭘….
이리 방금!
수용 조용히 해.
이리 내가 상식이 없다며 아까는 정상 아니라고 하더니 넌 상식도 없고 정상도 아닌 애랑 왜 친구 하냐.
노파 (문 쿵쿵) 안에 없어? 있지?
수용 가끔 그렇다고. 왜 이렇게 발끈해? 나도 가끔은 상식 없이 굴어.
이리 정말 박수를 보낸다.
노파 있네. 문 좀 열어봐, 총각!
이리 저 할머니 말귀 어두운 거 맞아? 별로 크게 말 안 하는데 다 들어.
수용 그래 내가 미안하다. 미안해.
이리 아이고, 엎드려 절 받기다.
수용 그래, 그것도 내가 미안해.
이리 할머니 아니었음 절대 안 했을 말이지.
노파의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수용, 무릎을 꿇는다.
이리 뭐하냐?
수용 미안.
이리 일어나…!
수용이 일어나지 않자 이리도 같이 무릎 꿇고
이리 뭐 하자는 거야.
수용 네 방식대로 사과하잖아.
이리 이게 무슨 내 방식이야.
수용 날 감정적으로 굴복시키고 싶어 하잖아.
이리 날 그런 쓰레기로 봤어?
수용 내 사과를 사과로 인정하질 않잖아.
이리 그건 맞는데.
수용 그것 봐.
이리, 노파가 만들어 내는 소음과 수용의 행동에 머리가 터질 듯하다.
이리 나중에 하자. 제자리걸음이야. 차라리 저쪽을 선택할래.
수용, 이리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이리 뭐해…!
수용 가지 마.
이리 왜 이래, 얘가…!
수용 이대로 나갔다가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이리 하지 마. 기분 되게 이상해.
두 사람 잠시 실랑이를 벌인다.
그 순간 노파의 문 두드리는 소리가 멈춘다. 두 사람 문을 가만 바라보고
노파, 집 안 소리를 듣기 위해 문에 귀를 대 본다.
이리 봐, 조용해졌어.
수용 안 갈 거지?
이리 어!
수용, 이리를 놓아 준다. 이리, 문으로 향하니 수용은 움찔거리고
이리 안 가!
이리, 문에 귀를 대 본다.
수용 (조심스레) 갔어?
이리 (속삭이며) 몰라.
노파 이봐!
이리, 화들짝 놀라 되돌아온다.
수용 거 봐.
이리 오늘 무슨 날이냐. 미치겠네. 벽하고 말하는 것 같아.
수용 나 말하는 거야?
이리 총체적으로 다.
노파, 문틈에 종이 한 장을 끼워 놓고 돌아간다.
수용 내가 벽이면, 나도 이렇게 부숴버릴 거야?
이리 부수는 건 네 아이디어잖아. 귀찮게 뭐 하러 그래. 나였음 그냥 이사 갔어.
수용 … 지금 절교 선언한 거야?
이리 아니. 뭐래 정말. 지금 벽 얘기하던 거 아니었어?
수용 그래, 벽 얘기하고 있었지. 네가 벽이랑 얘기하는 것 같다며.
이리 아니, 내가 말한 벽은 이 벽이고, 나라면 그냥 이사를 갔을 거라고! 네가 말한 벽은 그러니까 너고 네가 벽이라면 나는 이사를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문을 하나 내든가 창문을 하나 뚫든가 어? 뭐가 이렇게 어렵지. 울어?
이리, 적잖이 당황스럽다. (이쯤 노파는 자리를 뜨고)
수용 ….
이리 미안해.
수용 네가 왜 사과하는데?
이리 내가 남자 눈물에 약하잖아. 몰라, 그냥 튀어나왔어. 넌 왜 우는데. 무슨 일 있어? 오늘이 그날은 아니지? 아까 분명히 아니라고 했다?
수용 무슨 날.
이리 데드타임.
수용 아니야. 그냥…. 조기 갱년기 같아.
이리 이제 스물아홉이 웃기네.
수용 아예 가능성 없는 얘기는 아니지. 요즘 애들 사춘기 일찍 온다며. 아니면 비타민D 부족 우울증이든가. 모르겠어. 세상에 거대한 벽이 느껴져.
이리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고?
수용 너도 그래?
이리 생리 전 증후군이 딱 그래. 너도 정신적 생리하니?
수용 장난치지 마. (사이) 나는 그냥 햇빛을 보며 살고 싶어.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가.
이리 내가 아까 했던 말은….
수용 동구에 특수학교 설립이 2012년에 결정됐어. 근데 어떻게 된 줄 알아? 예정대로라면 올해 3월에 개교를 해야 했거든? 근데 아직 벽돌 한 장 못 얹었어. 여기는 그렇게 되면 안 되는데…. 희망이 안 보여….
이리 희용소는 눈에 보이는 게 아니지.
수용 희용소?
이리 희망, 용기, 소망. 희용소.
수용 (한숨) 오늘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
이리 장난치는 거 아냐. (잠시 생각을 고른다) 사랑이 눈에 보이니? 느끼는 거지. 사람을 움직이는 건 생각보다 사소해. 아주 작은 떨림이면 충분하거든? 나는 내가 처음 좋아했던 애를 떠올리면 지금도 손끝이 떨려. 심장은 말할 것도 없지. 여기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파동이니까. 내가 그 애랑 잘되지 않았다고 해서 걜 사랑하지 않게 되는 걸까? 내 첫사랑은 지독한 이성애자고 나는 더 지독한 레즈비언이라서 영원히 평행선에 설 수밖에 없지만, 걘 여전히 내 첫사랑이야. 결과가 본질을 대변하지 않는다고. 희망도 똑같아. 느끼는 거지.
수용 그러면 더 확실하네. 왜냐면 내가 요 근래 느끼고 있는 건 절망과 인류에 대한 혐오뿐이거든.
이리 진동을 만들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닐까. 네가 심장인가 보지, 네가 망치인 거야. 아까 망치질해 봐서 알잖아. 망치질하는 놈 손목은 아 나는 거라고. 그래서 네가 지금 힘들고 또 뭐냐, 절망과 인류에 대한 혐오를 느끼는 거야. 누군가는 네가 만든 진동을 느끼고 있어.
수용 … 희망사항이다.
이리 최소한 나는 느껴.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마.
이리, 수용의 곁으로 가 가만 안아 준다. 수용, 이리의 어깨에 머리를 가만 기댄다.
이리의 서툰 위로가 마음에 닿는다.
수용 내가 여자가 되면 날 사랑해 줄래?
이리 무슨 소리야.
수용 몰라, 그냥 튀어나왔어.
이리 난 널 사랑해. 네가 나에게 주는 스트레스와 삶의 충만함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어.
수용 스트레스는 알겠는데 삶의 충만함은 뭐야? 내가 너한테 그런 걸 줘?
이리 응.
수용 ….
수용,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느끼며 일어서 문으로 향한다.
이리 왜?
수용 좀 덥지 않아? 난 좀 덥네.
이리 열게?
수용 어. 열어드리게.
이리 이제 안 무서워?
수용 아니. 어. 아니. 내가 언제 무서워했다고 그러냐. 그냥, 혼란스러웠던 거지…. 가신 것 같기도 하고. 아직 계시면 나한테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걸 테니까….
이리 갑자기 용감해졌네.
수용 도와주겠지 뭐….
이리, 그런 수용을 보며 미소 짓고
수용, 머쓱하게 돌아서며 현관문(계단에 있는 문)을 연다.
무대 위 작은 무대, 노파는 종이 한 장을 날려 보낸다.
종이는 수용 앞으로 떨어진다.
특수학교 설립 찬성 서명서다.
이리 뭐가 적혀 있는데?
수용과 이리, 적힌 글을 보고
내가 배움이 짧아 글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알게 되어 늦게나마 표를 줍니다.
내 이름 석 자가 좋은 일에 쓰여 참 기쁩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아프게 해서 미안합니다.
이웃사촌 김옥형.
옥형이 있는 아래를 본다.
글쓰기 연습을 하는 옥형의 모습에서 암전.
2021-01-01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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