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불명확·진위 여부 상관없이 영향력 커 갈등 부추겨
특정 정당의 공천 탈락자 예상 명단이 적힌 이른바 ‘살생부 괴문서’는 총선 때마다 여의도 정가에서 반복되는 ‘데자뷔’이다.예전에는 출처 불명의 문서로 제작돼 복사본 또는 필사본 형태로 돌아다녔지만 최근엔 ‘찌라시’로 불리는 사설정보지를 통해 등장하고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확대재생산되는 등 ‘유통경로’만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나 보통의 정치관련 찌라시 내용이 그렇듯 ‘살생부’ 역시 불명확한 출처 속에 당을 뒤흔들고 계파 간 갈등을 부추겨 당에 생채기만 남긴 채 끝난다는 게 공통점이다.
새누리당 내에서 현재 논란이 되는 살생부 역시 예외가 아니다.
논란은 정두언 의원이 “김무성 대표가 친박(친박근혜) 핵심으로부터 현역의원 40여명의 물갈이 요구 명단을 받았고, 거기에 정 의원도 포함돼 있었다”는 얘기를 김 대표 측근으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일부 언론에 보도되면서 시작됐다.
이에 대해 김 대표는 이날 오전 최고위원회의에서 “저는 누구로부터 어떤 형태로든지 공천 관련 문건을 받은 일이 없고 말을 전해들은 바도 없다. 따라서 제 입으로 그 누구에게도 공천 관련 문건이나 살생부 이야기를 한 바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다만 김 대표는 지난 26일 김학용 비서실장을 통해 기자들에게 보낸 해명 문자메시지에서는 “그런 (40여명 물갈이) 요구를 받은 적이 없고, 정두언 의원과는 정치권에 회자되는 이름들에 대해 얘기를 나눴을 뿐”이라고 밝혔다.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정치권에서 이른바 ‘살생부 대상’이 나돌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이한구 당 공직후보자추천관리위원장이 전날 “당의 공식기구에서 철저하게 조사할 것”을 요청한 만큼, 이번 공천 살생부 사태를 둘러싼 ‘진실게임’은 점입가경식으로 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현상은 앞서 19대 총선의 공천 과정에서도 일어났다.
지난 2012년 1월 하순 4·11 총선을 앞두고 수도권과 영남권을 중심으로 38명의 현역의원 이름이 적힌 살생부가 여의도 정가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당시 살생부 명단은 수도권의 경우 초·재선에서 다선까지 선수가 다양했던 반면 대구·경북(TK)과 부산·경남(PK) 등 영남권은 중진 의원들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특히 당시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비상대책위원회가 경쟁력 및 교체지수를 토대로 현역 지역구 의원 25%를 공천에서 원천 배제하겠다고 발표한 상황이어서 현역의원들이 더욱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살생부 찌라시는 18대 총선을 앞두고도 등장했었다.
지난 2008년 4·9 총선때에도 정부 출범 직전 공천 작업이 한창일 때 이명박 당시 대통령 당선인 측에서 작성했다는 ‘살생부’ 명단이 돌아 현역의원들을 긴장시켰다.
그해 2월 중반에 돌았던 살생부에는 교체 대상인 현역의원 30여명의 이름이 적혔고, 이중에는 이 당선인 측과 박근혜 전 대표 측 의원들의 비율이 10여명씩이며, 5명은 중립 성향이었다는 구체적 분류도 함께 나돌면서 당내 갈등이 고조됐다.
17·16대 총선의 공천 때도 살생부가 회자됐다.
2004년 4·15 총선 공천을 앞두고 당시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당내 쇄신요구에 밀려 대표직에서 물러나면서 대폭적인 물갈이를 통한 ‘개혁공천’을 강조하자 당시 당 주변에서 현역의원 살생부가 나돌았다.
앞서 2000년 4·13 총선 공천을 앞두고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시민단체의 결집체 성격인 총선시민연대가 공천부적격자 명단을 발표하고, 이를 여야 지도부가 선별적으로 수용키로 하면서 현역의원들이 명단을 사전에 입수하려고 애를 태웠다.
이처럼 총선 때마다 살생부가 나도는 것은 후보공천을 앞두고 사전에 의원들의 의정활동을 토대로 유권자들의 물갈이 요구를 반영해 공천심사에 활용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 사전에 유출되는 경우도 없지않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익명성을 이용해 경쟁후보를 공천에서 떨어뜨리려고 하거나, 공천에서 떨어질 것을 우려한 일부 후보들이 자신의 낙천이 확정될 경우 ‘정치보복’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방어적 차원에서 생산해 유포한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 나경원 의원은 이날 오전 MBC 라디오에서 “살생부와 같은 얘기가 나오는 게 안타깝다”며 “선거와 공천 때마다 이런 얘기가 나오는데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냉정하게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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