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수습자 가족 릴레이 인터뷰 5]
“구명조끼 여기 있다. 빨리 탈출해!”세월호에 승선했다가 아직 돌아오지 못한 故 고창석(42) 단원고 교사가 마지막까지 질렀을 고함이다. 그는 미수습자다.
제자에게 구명조끼를 벗어준 그는 세월호 침몰 당시 더 많은 제자를 구하고자 더 깊은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생존한 제자들은 “선생님이 배에서 탈출하라고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우리의 탈출을 도왔다”고 입을 모았다.
10일 오전 그의 부인 민모(38·교사)씨는 3년 전 상황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남편은 그 해 초 단원고에 부임해서 학생인권부에 있었고, 저는 바로 옆 단원중에 있었습니다. 수학여행의 시작일이었던 2014년 4월 15일 남편은 평소처럼 일찍 집을 나섰어요. 이튿날 오전 8시 29분쯤 ‘아이들(당시 6살, 8살 두 아들) 챙기느라 고생했다?. (바다 날씨가 안 좋아)집으로 복귀 직전까지 갔지만 (인천항에서)출항했다’고 보내온 문자가 저에게 남긴 마지막 한마디가 됐네요.”
민씨는 “‘잘 다녀오라’는 저의 문자를 받기는 했는지 모르겠다”면서 “집을 나서던 그날 제대로 인사 못 나눈 것이 이렇게 두고두고 미안하고 아쉬울 줄 몰랐습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날 오전 9시 조금 넘어, 조회를 하고 교무실로 들어서니 난리가 났다. 여러 차례 전화를 했지만, 남편은 받지 않았다. “구명조끼 입고 바다로 뛰어들기만 하면 살 수 있다”고 다들 위로했지만, 안절부절못하다 수업에 들어갔다. 잠시 후 교감 선생님이 ‘모두 구조되었다’고 전해주셨고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라 안심도 했지만, 남편 성격을 잘 알기에 고민하다 아이 둘을 차에 태우고 남편이 갈아입을 옷을 챙겨 진도로 향했다.
함평쯤 갔을까. 먼저 도착하신 친정아버지로부터 전화가 왔다. “뉴스와 다르다. 생존 학생들이 옆에 고 선생님이 계셨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다. 맘 단단히 먹고 내려오너라.”
친정집에 아이들을 맡기고 팽목항으로 달려갔다. 바다만 쳐다보며 기다렸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더군요. 처음엔 살아 돌아오길 바랐고, 시간이 지나면서는 시신이라도 찾길 바라며 시신이 들어오는 항에서 하염없이 기다린 게 몇 달입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수색을 종료하고 나서도 돌아오길 기다린 게 또 몇 년입니다. 마지막 순간 얼마나 애들과 저를 보고파 했을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오빠(남편)를 생각하면 눈물이 쏟아집니다.”
수학여행을 떠나기 전 주말 농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모습을 바라보며 손 꼭 잡고 행복할 미래를 이야기했었는데…. 행복하다 자만해서 하늘에서 벌을 내린 건 아닌지 수없이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단다. 하지만, 남편은 늘 자신이 ‘교사’라는 사실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책임을 다했던 사람이다. 또, 입었던 구명조끼를 벗어주고 학생들을 찾으러 배 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는 남편의 용감한 행동을 헛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학생들이 모두 돌아오면 돌아올 것이다’라고 믿고 조용히 기다렸다.
아빠를, 남편을 잃은 삶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민씨는 아들 둘을 데리고 정든 안산을 떠나 먼 곳으로 이사했다.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는 아빠가 곁에서 갑자기 떠나간 것은 너무나 큰 상처였다. 그런 큰 사고를 겪고 아직 아빠의 시신조차 찾지 못했는데,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들과 다른 아이들이 아빠에 대해 물을 때 조용히 외면하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찢기는 듯했다. 밤에 자는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더욱더 가슴이 미어지고 울컥해서 눈물을 쏟은 게 몇 번인지 모른다.
“얘들아~ 인양되길 기다리자. 아빠 오시면 엄마가 학교랑 친구들한테 다 이야기 해줄게. 훌륭한 사람의 가족들은 원래 좀 힘들대. 조금만 참자.”
꼬맹이들에게 해줄 말이 이 말밖에 없었다. 세월호가 인양된 뒤 진도나 목포를 다녀오면 작은 애가 늘 물어본다. “이번엔 아빠 찾았어요? 저도 TV에서 다 봤어요.” 그래서 “세월호가 뭍으로 올라왔고 이제는 찾기만 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민씨는 올라온 배를 보면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눈물조차 나오지 않더라고 했다. 아이들에게 상처 될까 전전긍긍하며 미수습자 가족인 것을 숨기며 살았다. 아프다, 슬프다는 표현조차 제대로 못 하고 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가슴에 그 큰 상처를 묻어두었더니, ‘죽는 것이 차리리 낫다’라는 말을 실감한다. 인양과정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슬픈 일도 있었고 어려운 일들도 많았다.
“하루아침에 그 무거운 배가 어찌 올라오겠습니까. 매순간 관심 보여주시고 함께 기다려주신 많은 분과 인양이 결정되고 배가 올라오는 순간까지 가족의 일처럼 노력하신 분들이 계시기에 지금의 순간이 있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저 배 안에 내 가족이 있을 것이고 ‘이제 조금만 더 버티자’ 생각하며 하루하루 견뎌내고 있습니다. 이놈의 눈물은 왜 마르지도 않는지. 하지만, 모든 일들이 잘 해결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저는 지금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민씨는 “누군가를 원망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며 “미수습자 가족들을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인터뷰를 끝내며 간절히 부탁했다.
한상봉 기자 hsb@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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