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선 이 무대가 ‘신의 기적’

우리가 선 이 무대가 ‘신의 기적’

허백윤 기자
허백윤 기자
입력 2020-11-09 18:00
업데이트 2020-11-10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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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온 연극 ‘신의 아그네스’ 열연하는 박해미·이수미·이지혜

1983년 국내 초연한 명작
무대 이동이나 암전 없이
두 시간 물 안 마시고 연기

20년 만에 정통 연극 도전 박해미 “입이 바짝 마른다”
30년 경력 베테랑 이수미 “주저앉아 울고 싶어” 토로
데뷔 8년차 이지혜도 “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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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개막해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신의 아그네스’ 의 이지혜, 박해미, 이수미(왼쪽부터).  예술의전당 제공
지난 7일 개막해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신의 아그네스’ 의 이지혜, 박해미, 이수미(왼쪽부터).
예술의전당 제공
“지금 이 시기에 하느님의 기적은 더이상 없어요. 그런데도 난 기적을 갈망하고 있어요.”

한 오라기 실만큼이라도 기적이 있기를 바란다고 무대에서 외친 배우 이수미가 “지금 이게 바로 기적”이라며 감격스러워했다. 무대를 딛고 설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때에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거쳐 간 캐릭터를 얻었으니 절로 나올 법한 말이었다.

‘여배우들의 성지’로도 꼽히는 연극 ‘신의 아그네스’가 지난 7일부터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다시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1982년 미국 뉴욕에서 초연한 연극은 1976년 뉴욕 수녀원에서 실제로 일어난 영아 살해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사건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치열한 심리게임 속에는 종교와 구원에 관한 물음, 여성으로서의 아픔, 가족에 대한 상처 등 갖가지 실타래가 얽혀 있다. 무대에선 도발적이고 치밀한 설전이 이어지며 극이 전개될수록 각 인물은 절제했던 감정들을 극단적으로 쏟아 낸다.

당연히 탄탄하고도 다채로운 연기를 선보일 수 있는 배우만 세 가지 캐릭터 중 하나로 선택받을 수 있다. 1983년 국내 초연 당시 윤석화와 고 윤소정이 아그네스와 닥터 리빙스턴으로 열연했고, 이후 신애라(1992), 김혜수(1998), 전미도(2008), 선우(2011) 등 당시 높은 인기를 얻은 배우들이 아그네스를 연기했다.

올해 작품에선 1998년 ‘신의 아그네스’를 좀더 인간과 가까운 이야기로 해석했던 윤우영 연출이 22년 만에 돌아왔다. 박해미는 아이를 가진 것도, 낳은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수녀를 돕겠다며 질문으로 실타래를 풀어 보려는 닥터 리빙스턴으로 분하고, 이수미와 이지혜가 각각 법보다 성스러움으로 아그네스를 지키겠다는 미리암 원장 수녀, 순수하지만 광기도 감추고 있는 아그네스의 옷을 입었다.

넓은 무대에서 세 사람은 온전히 각자의 목소리와 표정으로 거미줄 같은 갈등을 엮었다. 무대 이동이나 암전은 없고 배우들도 거의 무대 밖을 떠나지 않는다. 두 시간 가까이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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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원에서 발생한 영아 살해 사건을 둘러싼 치밀한 심리게임을 다룬 연극 ‘신의 아그네스’의 한 장면. 무대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인간과 종교, 기적과 구원을 향한 도발적인 질문들을 아그네스의 순수와 광기로 풀어낸다. 박해미(왼쪽부터), 이지혜, 이수미가 닥터 리빙스턴, 아그네스, 원장 수녀로 열연한다. 예술의전당 제공
수녀원에서 발생한 영아 살해 사건을 둘러싼 치밀한 심리게임을 다룬 연극 ‘신의 아그네스’의 한 장면. 무대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인간과 종교, 기적과 구원을 향한 도발적인 질문들을 아그네스의 순수와 광기로 풀어낸다. 박해미(왼쪽부터), 이지혜, 이수미가 닥터 리빙스턴, 아그네스, 원장 수녀로 열연한다.
예술의전당 제공
고도의 신경전이 빈틈없이 벌어지니 베테랑 배우들도 기진맥진이다. ‘햄릿’ 이후 20년 만에 정통 연극에 도전한 박해미는 “입이 바짝바짝 마른다”며 도망가고 싶었다고 했고, 동아연극상 수상자이자 경력 30년의 베테랑 이수미도 “주저앉아 울고 싶었다”고 털어놨다. 데뷔 8년차 이지혜도 “어깨가 많이 무겁고 부담됐다”며 신인처럼 떨었다.

다만 이들은 너무나 소중한 시기에 소중한 작품에 임하게 된 감사함을 ‘기적’이라 여기며 도망가거나 주저앉지 않고 머리를 맞댔다. 훌륭한 선배들의 이름이 나열되는 전작들과 차라리 비교하지 말고 셋만의 스타일을 다지기로 했다. 작품 속 신을 향해 갈망하던 기적은 결국 인간의 몫이었듯, 명작 무대에 서는 기적을 세 배우가 자신들만의 열정으로 풀어내고 있다.

허백윤 기자 baikyoon@seoul.co.kr
2020-11-1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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