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우편저금 소송 경과

사할린 우편저금 소송 경과

입력 2010-03-22 00:00
업데이트 2010-03-22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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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9월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사할린 남부를 지배하게 된 일제는 1938년 국가총동원법을 제정한 뒤 조선인을 끌고 가 탄광이나 군수시설에서 강제노동을 시켰다.

이때 급여는 대부분 강제로 우편저금이나 간이보험에 넣게 했고 이 돈은 전쟁 비용이나 전후 일본의 경제 재건비용으로 사용했다. 탄광 등이 보관한 저금통장은 조선인 근로자의 도주를 방지하는 역할도 했다.

1945년 8월 패전 후 일본은 우체국 문을 닫은 뒤 사할린에서 철수했고 1946년과 1956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인을 데려가면서도 그들이 끌고 간 조선인 4만3천명은 사할린에 남겨뒀다.

경북 상주 출신의 김모(93)씨도 이 중 한 명이다. 1942년 9월에 징용돼 사할린 브이코프(일본명 ‘나이부치’)에서 탄광 채탄부로 중노동을 한 김씨는 일당(7엔)을 모두 우편저금에 적립해야 했다. 1992년 2월에야 한국에 영주귀국할 수 있었지만 징용되기 직전인 1941년에 결혼한 부인과 딸은 행방불명된 상태였다.

일본 정부는 김씨처럼 개별적으로 귀국한 이에게 이주비 등 어떤 보상도 하지 않았다.

남은 희망은 급료를 넣어둔 우편저금을 찾는 것. 김씨의 통장 잔액은 액면 금액으로는 942엔에 불과하지만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적어도 2천배인 188만4천엔(약 2천359만원)이 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에 따르면 1997년 현재 사할린 동포들이 우편저금에 넣어둔 돈은 59만 계좌에 액면 금액 1억8천700만엔(약 23억원)이고 간이보험은 22만건, 7천만엔(약 8억7천만원)이다. 현재가치로 바꾸면 5천140억엔(약 6조4천367억원)에 이른다.

일본도 언젠가 우편저금이나 간이보험 금액을 사할린 동포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우정공사의 전신인 일본 우정성 관계자는 1990년 4월 중의원에서 “사할린에 사는 분의 우편저금은 확정채무이고 청구가 있으면 지급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답변한 적도 있다.

이 채무는 일본 법률에 따라 일본 정부가 보증했다. 그런데도 일본은 구(舊)소련이나 러시아와 사이에 한일청구권협정 같은 개인청구권에 대한 특별조약을 체결하지 않은 채 50년 이상 문제를 내버려뒀고 내부적으로는 지급을 ‘보류’ 처리해뒀다.

사할린 동포와 유족들은 2007년 9월 일본 정부와 우정공사를 상대로 도쿄지방재판소에 보상청구소송을 냈다.

이에 대해 일본 정부는 자민당 정권 시절인 2009년 3월 들어 원고 11명 중 김씨 등 1990년대 이후에 한국에 영주귀국한 4명의 청구권은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소멸됐다고 주장했고 나머지 원고들도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실이 확인되면 마찬가지라고 주장했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일본 법정에 제기된 일제 피해자들의 청구권소송에 대해 “소멸시효가 지났다”거나 “일본 국내법에 의해 지급할 수 없다”는 등 다양한 주장을 해왔지만 이처럼 과격한 주장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 정부는 지난해 9월 도쿄지방재판소에 일본 정부의 주장을 반박하는 의견을 제출했고 원고측 변호인인 다카키 겐이치(高木健一) 변호사는 “이런 도의에 어긋난 주장은 한일협정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며 일본 정부에 주장 철회를 요구했지만 일본측은 2010년 3월22일 현재 아무런 반응이 없다.

2년반을 끈 이 소송은 조만간 1심 판결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도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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