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1963년 한국과 수교검토 왜

소련, 1963년 한국과 수교검토 왜

입력 2011-09-05 00:00
업데이트 2011-09-05 0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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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루쇼프 평화공존 노선 추구…美·日 北·中 견제 안전판 원해



옛 소련이 남한과의 수교·경제 교역 가능성을 검토한 1963년은 러·일 전쟁 패전(1904년)으로 소련이 한반도에서 발을 뺀 지 59년 되던 해다. 전문가들은 당시 공산주의 진영의 거두인 소련이 우리나라와 교류를 꾀하려 한 의도는 당시 국내외 정세를 들여다보면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소련이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려는 시도를 두고 미·소가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던 상황)를 평화롭게 해결한 소련은 이듬해 미국 등과 ‘부분 핵실험 금지 조약’을 체결하고 한국 등 자본주의 진영 국가에 협력의 손길을 뻗었다.

우선 ‘수교·교역 검토’의 배경에는 당시 소련 1인자였던 니키타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장의 ‘평화공존’ 노선이 깔려있다. 1953년 권좌에 오른 흐루쇼프는 전임자였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1인 독재’를 비판하며 ‘적대세력과의 화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자연스레 자본주의 진영과의 수교·교역 확대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남한과의 수교 검토도 이 같은 대외정책의 연장선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설명한다. 박상철 전남대 교수는 4일 “흐루쇼프의 소련은 미국과의 ‘체제대결’이 아닌 ‘체제경쟁’을 원했다.”라면서 “이 때문에 소련은 핵무기 개발 등에는 힘썼지만 재래식 병력은 줄이려 했고 이를 위해 남한과의 평화협력이 필요했던 듯하다.”고 말했다.

급변하던 동북아 정세도 소련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 소련은 중국과 이념분쟁을 벌이며 사사건건 충돌했지만, 중국과 북한은 밀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소련으로서는 극동 지역에 일종의 ‘안전판’을 만드는 것이 시급했다. 신종대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미국과 일본은 1960년 방위조약을 체결했는데 소련은 자신을 타깃으로 한 ‘반공 군사 동맹’으로 봤다. 그래서 남한에도 하나의 지렛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느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소련의 수교 움직임에는 당시 남한의 정세 변화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963년은 2년 전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정’이 남한의 실권을 쥐고 있을 때다. 소련은 좌익활동 전력이 있는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대해 친미파인 이승만 전 대통령과 달리 대화가 가능한 인물로 판단했다.

전문가들은 당시 한·소 수교가 실제 이뤄졌다면 한반도를 둘러싼 냉전이 급속도로 와해됐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박 교수는 “소련이 남한과 수교하고 미국도 북한과 국교를 맺어 교차수교를 했더라면 남북이 평화협정을 맺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면서 “우리나라도 동방정책(서독이 추진한 소련 등 동유럽국과의 관계정상화 정책)을 펼친 서독식 평화유지 방식을 따를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당시 한·소 수교 논의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흐루쇼프가 1964년 실각했고, 1963년 10월 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반공을 국시로 내걸면서 우리나라와 공산권의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됐기 때문이다.

유대근기자 dynamic@seoul.co.kr
2011-09-05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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