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이 운다…외래어 유포 앞장 지자체

세종대왕이 운다…외래어 유포 앞장 지자체

입력 2011-10-07 00:00
업데이트 2011-10-07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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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밸리’, ‘과학비즈니스벨트’, ‘에코센터’, ‘컨벤션뷰로’, ‘메디시티’, ‘북모닝’, ‘레인시티’.

누군가 이 같은 용어를 말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척해야만 할 것 같은 외래어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에서 판을 치고 있다.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한 한글날(10.9)이 1990년 공휴일에서 빠지고부터는 기념식을 여는 지자체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됐다.

한글날 제정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지자체의 외래어 남발은 특정 지역에 국한된 현상이 아닐뿐더러 한 두 해의 문제도 아니다.

부산시에는 ‘관광컨벤션뷰로’라는 기관이 있다.

회의나 모임을 뜻하는 ‘컨벤션(Convention)’과 사무실을 의미하는 ‘뷰로(Bureau)’가 합쳐진 이 기관명에 대해 시민들은 “무슨 뜻인지 알기 어려운 모호한 명칭”이라고 꼬집었다.

의료도시를 표방하는 대구시의 공무원들은 ‘메디시티(Medicity)’라는 용어를 입에 달고 사는가 하면 대구시 교육청은 학생들의 말하기 능력을 키운다며 도입한 정책에 ‘디베이트(debate)’라는 명칭을 붙였다.

이 때문에 ‘디베이트 연수회’, ‘디베이트 코치’, ‘디베이트 캠프’, ‘디베이트 클래스’ 등 한번 들어서는 무엇인지 모를 애매모호한 용어가 잇따라 튀어나왔다.

경기 수원시는 빗물을 모아 조경수나 변기 세척수 등 생활용수로 활용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빗물이용시설 보급 사업’이라고 하면 될 것을 ‘레인시티’라는 명칭을 붙였다.

또 수원시는 친환경 도시생태농업을 한다며 ‘커뮤니티 가든’, ‘에듀팜’, ‘로하스 레스토랑’이라는 외래어를 남발하고 있다.

여러 지자체는 불법 주차 문제를 해결해 쾌적한 골목길을 만들겠다며 담을 허물어 주차장 만들기, 녹지쉼터 조성 등을 추진하고 있는데 이 사업 명칭 역시 ‘그린파킹’이라는 외래어이다.

이 같은 사정은 대전도 예외가 아니다.

지역 곳곳에 특화거리를 만들겠다며 ‘유니버설 디자인 거리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대전 법동에 사는 최모씨는 “누구나 쉽게 부르고 이해할 수 있는 용어가 얼마든지 있는데 굳이 외래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광주에서는 도심 속 건축물의 인식을 바꾸겠다며 세계 유명 건축가들을 초청해 소형 건축물을 짓는 ‘어번 폴리 프로젝트(Urban Folly Project)’를 추진하고 있는데, 이 명칭을 아는 시민은 많지 않다.

이 지역에 사는 박모(39)씨는 “구 도심에 현수막이 붙어 있는 걸 봤지만 이름이 어려워 아직도 무슨 사업인지 모르겠다. 어번 폴리의 뜻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며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더욱이 지난달 광주시가 연 ‘김치 스토리텔링 전국공모전’ 역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음식인 김치에 불필요한 외국어를 붙였다는 지적을 받았다.

외래어를 합성한 신조어까지 나오고 있다.

독서교육도시를 표방하는 대구시 교육청은 ‘북모닝 대구’라는 구호를 내걸었고 경기도는 지난해 각종 기록을 보유한 도민을 대상을 한 ‘끼네스(GGuinness) 대회’를 열었다가 상표권 문제가 불거지자 슬그머니 ‘경기도 최고’라는 명칭으로 바꿨다.

충북도는 ‘전국 우리말 사랑왕 선발대회’, ‘찾아가는 국어교실’ 등을 운영할 정도로 지자체 중에서 유일하게 ‘우리말 사랑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외래어 남발은 다른 지자체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바이오메디컬허브, 메디컬그린시티, 테크노폴리스 등은 생명의약중심지, 의료중심도시, 첨단산업연구도시로 바꿀 수 있지만 꾸준히 곳곳에서 쓰이고 있다.

충북도의 한 관계자는 “행정용어 순화, 국어능력향상교육 등 내부에서부터 우리말 순화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우리말 사랑운동을 확산시켜 나가겠다”고 강조했다.

충북참여자치연대의 송재봉 사무처장은 “영어 철자를 틀리면 수치스러워하면서 한글맞춤법을 틀리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현상마저 있다”며 “정부나 지자체, 공공기관의 무분별한 외국어 숭배행태가 언어풍토 왜곡을 심화시키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송 처장은 “몇 년 전 공무원에게 ‘왜 영어를 많이 쓰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지사가 칭찬을 많이 한다’는 웃지 못할 답변을 들었다”면서 “지자체 수장이 주민과의 소통을 강조하면서도 외래어를 사용해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점에서 수장들의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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