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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했던 ‘가메이도 학살’…희생자 유족 찾기까지

끔찍했던 ‘가메이도 학살’…희생자 유족 찾기까지

입력 2014-01-21 00:00
업데이트 2014-01-21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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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미문의 만행’ 조선인 학살 증언·자료 추적 결실

관동(關東·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의 희생자 유족이 한일 양측의 증언, 기록을 통해 국내에서 처음으로 확인됐다. 당시 도쿄 고토(江東)구 가메이도(龜戶) 경찰서에서 제주출신 조묘송씨 일가족 5명 모두가 일본군에 희생된 ‘가메이도 학살’ 사건과 유족을 찾기까지의 과정을 담았다.

◇ 끔찍했던 가메이도 경찰서 학살 사건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께 규모 7.9의 대지진이 도쿄를 비롯한 일본 관동지방을 강타했다.

대지진이 발생한 다음날부터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폭탄을 소지하고, 방화를 한다’는 괴소문이 나돌았고 일본은 즉각 계엄령을 선포했다.

일본 군대와 경찰, 각지에서 만들어진 ‘자경단’이란 자위집단 등이 죽창과 쇠갈퀴, 곡괭이로 조선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터무니없는 유언비어가 나돈데다 4년 전 일어난 3·1 독립운동 여파가 일본에도 미칠 것을 우려해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조선인들을 곳곳에서 무차별 학살하는 전대미문의 만행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도쿄 고토구 가메이도 경찰서에 9월 2일 밤부터 3일 오전까지 300여명의 조선인들이 격리 수용돼 있었는데 일본 내 사회주의자 척결에 나섰던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경찰서까지 들이닥쳤다.

그날 오후 1시께부터 한 장교의 지휘 아래 군인들이 연무장으로 들어와 조선인을 세 사람씩 불러내 연무장 입구에서 총살하기 시작했다.

가메이도 지역의 일본 사회주의자들을 척결하면서 이들과의 결탁 등을 우려, 평소 감시를 강화했던 조선인 학살에 나선 것이다.

지휘자는 총소리가 들리면 인근 사람들이 공포감을 갖게 될 터이니 총 대신 칼로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 뒤부터는 군인들이 일제히 칼을 빼 나머지 83명을 한꺼번에 죽였다.

이때 임신한 여성도 한 사람 있었는데 일본군이 그 부인의 배를 가를 때 배 가운데서 어린 아기가 나왔다. 일본 군인들은 갓난아이가 우는 것을 보고 그 어린 아기까지 찔러죽였다.

시신들은 다음 날 새벽 2시 화물자동차에 실려 어디론 가로 옮겨졌다.

◇ 조씨 일가 희생자 유족 찾기까지

이같은 사실은 당시 일본 유학 중에 ‘재일본 한국기독교청년회’ 이사로 관동 조선인 학살 희생자 실태를 조사했던 ‘재일본 관동지방이재(罹災)동포 위문반’의 일원이었던 최승만(崔承萬)씨가 남긴 기록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일본 시민단체 ‘간토대지진 때 학살된 조선인 유골을 발굴해 추도하는 모임’의 니시자키 마사오(西崎雅夫)씨에 따르면 최씨가 활동한 ‘이재동포 위문반’은 당시 일본 각지를 돌아다니며 살아남은 조선인 동포 등을 상대로 실태를 은밀히 조사했다.

1923년 12월 5일자 상하이(上海) 독립신문에 실린 총 조선인 희생자 숫자 ‘6천661명’과 일본 각지의 희생자 숫자들은 이 위문반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씨는 사건 당시 가메이도 경찰서에서 조선어 통역으로 일했던 나환산(羅丸山·조선인 추정)의 목격담을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 기록은 1970년 일본에서 발행된 코리아평론이라는 잡지에 게재됐다.

이 기록에는 당시 가메이도 경찰서에서 학살된 희생자 신원으로 5명이 나와 있는데, 이 중 3명이 ‘趙妙城 제주도 대정면 인성리(임신한 여인), 趙正洙(주소 上同), 趙正夏(주소 上同)’로 기록돼 있다. 나머지 2명은 ‘朴慶得(24) 경기도 개성군장가면구하리’, ‘金在根(44) 전남 순창군 풍산면 연승리’로 신원이 나와 있다.

이 증언 기록은 니시자키 씨가 도쿄의 공립 도서관 등을 뒤져 발굴한 당시의 발표자료, 일기, 자서전 등에 나와 있는 조선인 학살 관련 증언 등을 담아 정리한 ‘증언자료집’과 ‘희생자 이름 판명 리스트’에 수록됐다.

이를 토대로 제주출신의 희생자 유족을 추적한 결과 이들이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에 살다 인근마을인 안성리로 옮긴 조팽식(趙彭植·1870∼사망일자 미상)씨의 자식들로 형제간인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제적부와 족보에는 ‘조묘성’은 ‘조묘송(趙卯松·1891∼1923)’으로 ‘조정수’는 ‘조정소(趙正昭·1900∼1923)’, ‘조정하’는 ‘조정화(趙正化·1904∼1923)’로 이름이 한자씩 달랐다. 또 최씨의 기록에는 없었던, 조묘송의 아들과 부인도 학살된 것으로 확인돼 일가족 5명이 모두 죽임을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조묘송의 아내는 문무연(文戊連·1885∼1923)씨로 유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임신 중이었으며 이들은 슬하에 아들 조태석(趙泰錫·1919∼1923)을 두고 있었다.

유족들에 따르면 희생된 조씨 형제는 1910년대 초반 공부를 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희생자 유족들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대한노인회 대정읍분회 분회장 임영일(77)씨와 향토문화조사위원 김창선(82)씨 등 제주 대정읍 인성리와 안성리 마을 노인들의 도움으로 유족을 찾는데 성공했다.

임씨는 조묘성, 조정수, 조정하의 이름을 취재진으로부터 전해듣자 1940년대 대정읍 마을 이장 등을 지냈던 조정표씨와 동생 조경생씨 등을 기억해 냈다. 희생자들과 조정표·조경생씨가 같은 집안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어 조정표씨의 손자 조민성씨에게 연락, 족보를 통해 이들이 같은 집안 출신임을 확인했다.

족보에는 조묘송, 아내 문무연, 조정소, 조정화, 조태석 모두에 ‘忌 九月一日 日本國 關東地震 犧牲 別世’(9월1일 일본국 관동지진 때 희생당함)라고 기록돼 있었다.

또 ‘一九二三年 日本國 關東地震 日本國 政府 만행에 의해 학살당함’(1923년 일본국 관동지진때 일본국 정부의 만행에 의해 학살당함)이라고 손으로 쓴 글이 함께 적혀 있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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