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없는 곳 없었다… 싱가포르·인니 섬 어딜 가도”

“위안부 없는 곳 없었다… 싱가포르·인니 섬 어딜 가도”

이슬기 기자
입력 2015-08-03 23:50
업데이트 2015-08-04 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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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군무원 출신 ‘故송복섭씨 육성’ 고노 담화 22주년 앞두고 공개

“어딜 가도 (조선인) 위안부가 없는 데가 없었습니다. 싱가포르에도, 인도네시아 수마트라섬에도 다 있었어요. 수마트라 팔렘방 지역에는 제1명월관, 제2명월관 두 곳에 나뉘어 있었는데 그곳을 한국인 형제가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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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8월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을 공식 인정한 ‘고노 담화’ 발표 22주년을 하루 앞둔 3일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가 일본군 군무원 출신 송복섭씨의 인터뷰 영상 일부를 공개했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제공
1993년 8월 일본군 위안부 강제 동원을 공식 인정한 ‘고노 담화’ 발표 22주년을 하루 앞둔 3일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가 일본군 군무원 출신 송복섭씨의 인터뷰 영상 일부를 공개했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제공


일본 정부가 1993년 8월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 동원을 공식 인정한 ‘고노 담화’ 발표 22주년을 하루 앞둔 3일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군무원으로 전범 재판을 받았던 한국인의 육성 증언 영상이 처음 공개됐다.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는 싱가포르에서 B·C급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던 일본군 군무원 출신 송복섭(작고)씨가 1990년대 초 증언한 인터뷰 영상 일부를 공개했다. 송씨는 생전에 자신이 근무했던 부대의 조선인 위안부 61명의 명단을 공개한 바 있다.

송씨는 영상에서 “수마트라섬 팔렘방 지역에는 한국인 위안부들이 ‘제1명월관’, ‘제2명월관’이라는 두 곳에 나뉘어 있었다. 군인들이 치른 요금은 50전이었고, 문 앞에도 ‘한 발(一發)에 50전’이라는 안내문이 있었다”고 전했다. 당시 명월관 운영자는 송씨 성을 가진 한국인 형제로, 이들이 일본군의 ‘끄나풀’이었다고 그는 증언했다. 이 형제는 일본 패망 후 조선인회에 들어가지 못하고 오히려 끌려가서 매를 맞았다고 말했다. 위안부들이 종전 후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고 전했다.

그는 전범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을 위기에 처했다가 자신이 돌봐 줬던 영국군 포로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송씨는 “담배와 커피를 몰래 가져다 주면서 친분을 쌓았던 영국군 포로인 리즈 중령이 아프리카에서 날아와 나를 위해 증언해 줬다”며 “이후 무죄로 풀려났는데 싱가포르에서 재판받은 한국인 중 무죄로 풀려난 사람은 두 명뿐이라는 얘길 들었다”고 말했다. 무죄 판결 이후에도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법정에 다시 섰던 송씨는 계속해서 감금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그는 1947년 5월 일본 사세보로 갔다가 부산을 거쳐 고향인 전남으로 귀환했다고 진술했다. 유족회에 따르면 송씨는 1940년대 초 강제 징용을 피하기 위해 일본군 군무원으로 입대, 인도네시아에서 포로 감시원과 보급병 등으로 일했다. 1945년 일본 패망 후 팔렘방 지역의 자치조직인 ‘조선인회’에서 감찰 역할을 했다.

이슬기 기자 seulgi@seoul.co.kr

2015-08-04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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