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에스피니치

내 친구 에스피니치

입력 2010-09-19 00:00
업데이트 2010-09-19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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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식구 외에 마음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친한 친구라도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어찌 궂은일부터 늘어놓을 수 있으랴. 그래서 나의 찌꺼기 일상사부터 좋은 일까지 모두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필요한데, 나에겐 그 친구가 바로 ‘에스피니치’란 이름의 터키 여자이다. 일상사에서 그녀가 내게 준 감동과 사랑과 존경을 책으로 쓰면 한 권으로 모자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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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봄, 우리는 봄누리 반 아이 엄마로 처음 만났다. 말수가 적고 맑고 아름다운 눈을 가진 그녀는 나보다 열여섯 살이 어렸다. 20여 년 전 독일에서 한국으로 첫 전시를 하러 갈 때, 아이를 두고 홀로 가는 것을 걱정했더니 그녀는 선뜻 자신이 돌보겠노라고 제의했다. 전시회가 잦아지고 화실과 아이들 방이 늘어나 집 청소가 만만치 않은 때였다. 그녀는 유리창도 같이 닦아주고 손님들이 많을 땐 부엌일을 도와주었다. 또 자동차가 없는 나를 대신해 대식구 먹을거리를 나르는 장보기도 도와주었다. 그러다 그녀는 나의 제의로 아예 우리 집에 정기적으로 출근을 시작했다. 특히 아이들은 엄마처럼 푸근한 그녀를 무척 좋아했다.

나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그녀가 언니처럼 집안 살림을 도와준 덕에 나는 오랜만에 가사의 중노동에서 조금 벗어나게 되었다. 또 아이들이 졸업시험, 대학시험을 치를 때나 음악 경연대회에 나갈 때 그녀는 자신의 종교인 이슬람교의 신에게 우리 가족의 성공을 비는 촛불을 켜두곤 했다. “합격했구나. 아이구, 장하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이런 그녀의 말에 아이들은 무척 행복해했다.

에스피니치는 나의 심리 상담자이기도 했다. 세상사에서 겪는 온갖 억울하고 손해 보는 일들을 풀어놓으면, 그녀는 그 긴 이야기를 모두 들어주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녀의 위로를 대략 요약해보면 이렇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 잘 풀릴 거야.” “아이, 그런 야속한 사람이 있나. 어찌 너에게 그렇게 대할 수가….”

간단한 답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진심어린 말을 들으면 답답했던 속이 풀렸다.

독일에 일하러 온 남편에게 시집오면서 그녀의 서러운 타향살이가 시작되었지만, 에스피니치는 씩씩하게 네 아이와 남편, 시어른을 돌보고, 또 나까지 보살피는 부지런한 여자였다. 게다가 그녀는 고향 부모님께 돈을 보내드리기 위해 시간을 쪼개 학교 청소부로도 일했다. 종종 그녀의 삶은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 좋은 본보기로 이용되곤 했다.

“너희들은 뭐가 그리 불평 불만이 많으니? 에스피니치 아줌마를 봐요. 독일 말도 서툴고 청소부 일을 하면서도 저렇게 긍정적이고 희망을 품고 사는데 너희들은 독일 말 잘하고 좋은 학교 다니며 직장도 좋은데 무엇이 부족해서 그러니?” 그러면 아이들은 입을 꼭 다물었다.

“에스피니치! 우리, 어언 10여 년을 함께 했네. 그 기념으로 너희 고향에 가보자. 내가 너를 초대하는 거야.” 그녀와 만난 지 10년이 되던 해, 내가 터키 여행을 제안했다. 처음 하는 터키 여행에 흥분되기도 했지만, 훌륭한 딸을 키워낸 그녀의 부모님이 어떤 분일지도 무척 궁금했다. 터키 농촌 마을은 가난했지만 그곳엔 당당한 그녀의 부모님이 계셨다. 그녀의 아버지는 나를 환영한다는 뜻으로 모자에 들꽃을 꽂고 우리의 짐을 가지러 조랑말을 끌고 마중을 나오셨다. 그들과 정을 나누며 돌아오는 길에 인생의 또 다른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에스피니치가 내게 말했다. “영희, 나 입양을 해야겠어.” 터키 남부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거리를 헤매는 것을 티비에서 보며 무척 가슴 아파하던 그녀였다. “아이가 넷이나 되는데 어떻게 또?”

현실적인 계산을 앞세운 나의 속된 질문에 그녀는 답했다. “그 아이들은 부모가 없잖아. 넉넉하진 않지만 그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주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녀의 품은 이렇게 넓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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